불법과 범죄를 자행하는 사이비는 배제하고, 공인된 4대 교파의 기독교 교리는 ‘살면서 많은 사람을 전도’하면 복을 받는 행위로 명시되어있다. 타인에게 “교회 가보자.”라거나 “주님은 너를 사랑하셔!”와 같은 말을 꺼내는 일은 기독교인의 선택이다. 하지만 유독 기독교인 당사자의 가족 구성원 안에서는 이 문제가 선택이 아니라 강요가 될 확률이 높다. 구원받지 않고 죽으면 지옥에 가기 때문에 내 가족을 지옥에 보낼 순 없지! 하는 마음이라면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이 당연해 보이는 생각은 수많은 기독교 가정이 현실에서 시궁창을 겪는 불씨가 된다.
우리 주변에 꼭 한 명은 있는, 독실하게 교회 다니는 집 애가 바로 나다.
어렸을 적엔 급성 아토피 피부염으로 죽진 않는데 죽을 만큼 괴로웠다. 13살까진 병원 입원 생활을 해야 했다. 교회 사람들이 찾아와 기도해주고 가고 온 가족이 위로해주었다. 여기까진 아름다운 이야기인데, 그 뒤로 나는 자력으로 독립할 때까지 부모에게 네가 어떻게 큰 줄 아느냐, 너는 평생 갚아도 부족하다는 가스라이팅을 들으며 자랐던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아버지는 대기업 중공업 엔지니어셨는데 IMF 때 권고사직을 피하려고 지방발령이라는 노선을 택한 뒤 우리 가족은 1년 주기마다 이사를 해야 했다. 만남보다 이별이 잦았고, 지독하게 외로웠다.
친구가 책뿐인 문학소녀였던 나는 전국 도서관을 충실히 다녔는데, 사춘기 시절 문득 내가 교회에서 연기만 잘하지 신을 믿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각종 종교, 철학에 관련된 서적을 많이 찾아 읽으며 진실이 뭘까 찾았던 기억이 난다. 아무리 읽어도 개개인의 믿음의 문제이지 종교 중에 뭐는 틀리고 뭐는 맞는다는 가늠은 할 수 없었다. 애초에 종교란 인간 세상의 윤리와는 다른 신념의 사상들이지 않은가. 14살 정도의 나이에 나는 종교에 묶인 부모님과 다른 인생을 살겠노라 결심했다.
행동력이 좋은 꼬마였던 나는 처음에 무작정 교회에 안 나가봤는데 곧바로 용돈이 끊겼다. 일요일 하루 안 나가면 월화수목금토를 괴롭히고 잔소리하는 부모님을 견디지 못하고 대학 갈 때까지는 숨죽여 살기로 했다. 한두 주 버티다가 다시 교회에 끌려나갔다.
아름답고 아름답던 10대에 나는 종교 안에서의 소모적인 사회생활에 따른 공허와 허탈함을 배웠다. 모두가 웃고 즐겁고 행복해 보이지만 들어보면 삶이 힘들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힘들어서 교회에 종교에 옹기종기 모여있는데, 그 시간에 자기 계발이나 삶을 바꿀 생각을 하는 이들 또한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 기묘한 평온 안에 갇혀 위선과 기만을 느꼈다. 어쩌면 가만히 있지 못하고 늘 해결 방법을 찾는 나의 성정이 종교와는 애초에 맞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기독교 달력의 연례행사들을 마치며, 수도 없이 사계절이 가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만 19세 생일을 앞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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