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가 바뀌면 알차게 살겠다며 멋들어지게 계획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정성을 들여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수험생 부럽지 않은 일정을 촘촘히 세웠다. (파워J가 극단적으로 N일 때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 그 일정은 아래와 같았다.
- 월요일: 출근 전 영어수업을 듣고 경제뉴스 팟캐스트를 들으며 출근한 뒤 퇴근해서는 요가를 하고 일본어 공부를 하겠다. -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월요일과 비슷하게 퍽퍽한 일정 - 토요일, 일요일: 아침에 요가를 하고 건강한 음식을 차려 먹은 뒤 글을 쓰거나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 문화생활을 하겠다. 영화를 본다든지.
1월 첫 2주 동안은 참 잘했어요 스티커를 줄 만했다. 자기 전에는 뿌듯함 때문에 이불을 바스락거리며 잠이 들었다. 그러나 곧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출근할 때 노트북을 가져가지 않아서 집에 다시 돌아온다거나, 요가복 없이 요가원을 가고, 검색창을 열자마자 무엇을 검색하려고 했는지 까먹었다. 갑작스럽게 갓생 드링크를 과용한 바람에 고장이 났던 것이다. 카페인은 입도 대지 못하면서 고용량을 섭취했으니 탈이 안 날 리가 없었다.
셀프 고문에 허덕이고 있는 중에도 주말의 문화생활은 놓칠 수 없어서 영화관에서 <넥스트 골 윈즈>(2024)를 봤다. 재밌게 보고서는 축구공으로 머리를 세게 맞은 기분이 들었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살고 있었지?
실화를 바탕으로 한 <넥스트 골 윈즈>는 토마스 론겐 축구감독이 2년 전 사고로 사퇴한 후 아메리칸사모아의 축구 감독을 가게 된 이야기를 다뤘다. 아메리칸사모아는 한 골도 넣어보지 못한 피파 최약체 국가로 호주에게는 31 대 0으로 져본 적도 있었다. 아메리칸사모아의 축구협회장은 론겐에게 이렇게 강조한다.
‘우리가 원하는 건 한 골입니다. 단 한 골. 한 골. 한 골. 한 골!’
론겐은 아메리칸사모아 축구팀이 제대로 된 축구팀으로 거듭나게 하고자 온 힘을 다한다. 분노조절장애가 다소 더해지지만 체력 훈련과 포메이션을 열성적으로 가르친다. 선수들도 노력한다. 다만 기도 시간에는 훈련을 멈추고 기도하고 일요일은 주일이니까 훈련을 하지 않는다. 론겐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이다. 한 골이라도 넣고 싶다면서 죽을 만큼 열심히 하지는 않는다니. 그러나 그도 아메리칸사모아 사람들과 함께 부대끼다보니 감화된다. 단 한 골 같은 삶의 목표보다도 삶 그 자체가 더 중요하다는 걸 이해하게 된다.
‘인생을 즐겨. 축구도 그냥 게임일 뿐이지.’
론겐이 월드컵 예선 경기장에서 대사를 내뱉는 순간 내 몸 안에서도 ‘갓생’의 뻣뻣함이 슈루룩 빠져나갔다. 고백한다. 매년 연초에는 이런 사이클이다. 매번 깨달을 수 있다는데 감사해야 하는 걸까. 이 정도면 신께서 적절한 타이밍에 콘텐츠를 하사하시는 게 틀림없다. 앞으로 더 잘 살기 위해서 현재를 덜 살아서는 안 되느니라. 아멘. 적당히 살자는 마음은 아니다. 어떤 의미로 지속 가능하게 살자는 의미다. 흔들리는 새해에서 다시 힘을 빼고 살아본다. 비워둔 곳에 다른 것이 흘러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