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두괄식을 좋아하니 결론부터 말하자면, 스무 살이 되었다고 바로 자유로워질 수 없었다. 만 19세가 넘은 나는 어엿한 대한민국의 성인으로 담배, 술, 운전면허, 아르바이트, 심지어 부동산 계약까지 할 수 있었지만, 종교만은 자유로운 선택의 범주가 아니었다. 종교전쟁을 일으켜 십자군처럼 부모님과 절연을 두고 싸우기에 나는 아직 어렸고, 계획형이었지만 패전 시 인생 보전금이 부족했다.
좌충우돌하면서도 20대 내내 독립을 위한 노력은 꾸준했다. 첫째, 집에서 가능한 멀~리 있는 대학을 노리고 입시를 준비했으나 성적이 반대하여 떠나지 못했다. 두 번째 시도는 워킹홀리데이. 이 때는 당시 유학생들에게 위험한 사건·사고가 잦아서 모든 준비를 마쳤음에도 출국하지 못하게 하셨다. 세 번째엔 필사의 설득 끝에 회사에서 가까운 친구 집으로 탈주했다. 그마저도 매주 교회 예배에 출석하는 조건이었다. 친구들은 모두 ‘너는 왜 인생이 주 6일뿐이냐’며 나를 가여워했다. 워낙 독실해서 금욕적이던 집안을 떠나 나를 받아준 친구와 단둘이 지냈던 날들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너무 이른 시간의 통금도 없었고, 숨을 옥죄던 부모님의 교회 봉사 강요와 결혼 잔소리도 없었다. 꿈 같던 1년 후엔 부모님의 일산 본가로 돌아왔다. 자유롭게 살다 돌아온 탕자는 불협화음을 피부로 느끼는 격동의 생활을 해야 했다.
이즈음 나의 두 살 아래 여동생은 유아교육과를 전공했다. 양육방식의 비정상성을 감지하고 각성하여 언니인 나보다 일찍 부모님과 전쟁을 선포했다. 그녀는 무려 집 앞의 어린이집 교사였는데도 불구하고, 부모와 따로 살기 위해 집 앞에 월세를 살았다. 집안의 가전들을 하나님 곁으로 보내고 아버지와 폭력사태 직전까지 전투하던 그녀다. 당시 못난 언니였던 나는 ‘저렇게까지 한다고?’하고 탄복했다. 부모님의 사랑한다는 말의 그루밍에 길들여져 있던 내게 동생의 폭주는 경이롭고 존경스러웠다. 비교적 일찍 독립한 동생은 지금 사랑하는 이와 결혼해 행복하게 산다. 그랬던 여동생이 내게 충격적인 반전을 선사했다. 부모님과 의절한 그녀가 아직도 부모님과 같은 교회를 다닌다는 사실이다.
”언니도 엄마아빠 신경 쓰지 말고 교회 나오고 싶으면 나와.
그 사람들이랑 나의 믿음은 관계 없잖아.”
내 처지에서 ‘교회’란 부모님이 내게 강요한 모든 것의 핵심이다. 나는 인생에서 잘라내고 싶은 것 중 1순위가 종교인데, 동생은 달랐던 걸까. 신기하고 경악스럽기까지 하다. 끌려나가던 교회를 결국 제 발로 가는 동생을 보며, 삶의 전반에 녹아든 기독교 가정의 문화는 바오밥나무 뿌리처럼 깊다고 느낀다. 동생 또한 그녀의 삶을 산 것이지 부모님을 만족시키려고 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부모님은 동생이 단지 결혼하고 교회를 나간다는 이유로 화해한 것도 아닌데 동생을 완전히 인정하셨다. 그렇다고 나도 대뜸 결혼하는 식으로 부모에게서 독립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까딱 정신 차리지 않으면 잘못해서 결혼할까봐 주의하며, 부모님의 권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살고 적금을 했다. 하루는 더디고 일 년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어서 오라고 한껏 고대하던 서른의 날, 만 29세를 찍은 나에게 드디어 독립의 봄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