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서른은 10대나 20대보다 나았다.
이불 밖 세상은 여전히 위험했지만, 뭘 몰라서 용감했던 20대보다 조금은 더 알고 대처하는 법을 배웠다. 만 29세, 30세가 되고 지금껏 어렵사리 모았던 3년, 5년 적금들의 만기를 채웠다. 종잣돈인 보증금을 모아 드디어 부모님으로부터 완전히 경제적으로 독립했다. 독립이란 결국 ‘경제력’의 다른 이름이었던가. 강서구 마곡의 회사 코앞 원룸에 자리를 잡았다. 5.989평의 쪼그만 방에서 너무너무 행복했다. 좋아하는 색과 내가 고른 물건으로 ‘나만의’ 방을 꾸미며 취향, 자아와 함께 내 삶마저 다시 찾은 것 같았다. 그러나 완전한 자유는 아니었다.
독립 초반엔 교회는 안 나가더라도 전화와 연락을 자주 했다. 지금껏 같이 살며 자동차까지 사드렸던 K-효녀 관성대로, 각종 가전도 해드렸다. 들으라는 듯 “냉장고 바꾸고 싶다~”는 말에 자발적으로 갖다 바쳤던 것 같다. 나 자신은 작달막한 방에 박혀있으면서 나의 안위와 영달보다 대궐 같은 집에 사는 부모를 신경 썼다. 나를 아끼는 사람들에게 어릴 적부터 가스라이팅이니 그루밍을 당하고 있었다는 걸 듣고서야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억대 연봉이라며 안팎으로 자랑하던 아버지께 정작 나는 인생에 있어 도움받은 것이 없었다. 여자애가 결혼해서 출가하는 것도 아닌데 왜 부모 챙기면서 살지 않고, 어딜 네 맘대로 나가느냐 타박하셨다. 결혼 안 하면 아무것도 주시지 않는다고 하니 결혼 생각이 없는 나로서는 기약이 없었고 기대도 소멸했다. 더군다나 무언가 받는다면 각종 조건이 걸려서 안 받느니만 못했다. 지금도 부모의 도움을 받을 생각은 없지만, 풍족한데도 자신들의 뜻대로 살지 않는다며 자식을 지원하지 않는 부모는 내 눈엔 기형적으로 보였다. 내가 부모라면 그러지 않을 테니까. 여동생이 결혼할 때도 부모의 부와 재산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금액을 지원하셨던 걸 떠올리면 내가 다 사돈댁에 쪽팔렸다. 내가 힘겹게 벌어 순수한 사랑으로 쏟았던 정성들을 부모는 키워놨으니 당연하게 받았다. 그 짓을 멈추니 애가 변했다며 서른 넘은 직장인인 내가 가출했다고 말하고 다니셨다. 직종 변경 사유로 전 직장을 퇴사하며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말하지 않았더니, 회사에 전화하고 찾아와 난동을 부리셨다. 오히려 상사님들과 동기들이 수치스러워하는 나를 안심시키고 위로했다. 그 뒤로도 사방에 나의 정보를 캐묻고 다니셔서 연락은 받되 피해는 받지 않으려 정보를 드리지 않게 되었다.
사는 곳, 직장 등 나의 신변과 관련된 정보에 대해 공유를 끊기 전 마지막으로 나를 키워주신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살면서 느낀 서운함과 내 마음을 담은 장문의 아날로그 편지를 드렸지만, 그에 대한 답변은 내 마음을 더 찢어 놓았다. 모(母)는 네 말은 사실이 아니고 네가 거짓말하는 것이라 했고, 부(父)는 할 말이 없다고 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은, 부모가 믿는 종교와 부모가 원하는 삶을 강요해서 미안하다는 사과와 앞으로 너의 길을 응원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말이라고 알려드렸는데도 그게 다였다. 반대로 그분들이 부모로서 딸에게 하시는 말들과 ‘내 인내심이 바닥나면 부모·자식 연이 어찌 될지 모른다.’ 라며 협박하는 모습을 봤다. 그 지경까지 가서야 마음속에서 그들에 대한 일말의 미련과 사랑을 한 톨도 남김없이 박멸할 수 있었다. 어쩌면 부모에 대한 짝사랑이 나 자신의 자유를 가로막는 마지막 울타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마침내 자유케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