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누군가가 너무 그리워 멍해질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움은 참 집요해서 다 잊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오면 다시 자기를 보라며 돌려세웁니다. 그런데 그리움은 사랑에서 시작된 것이란 걸 깨달았을 때 더 이상 그리움이 쓸쓸한 감정으로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애타게 사랑했다면 그 흔적은 어떤 형태로든 남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은은하게 번지는 사랑을 물려줍니다. 제가 만난 문장들도 그리움을 통해 다시 사랑할 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할머니는 물었고 내가 대답 없이 마주보고 실쭉 웃으면 다음날은 어김없이 옥수수를 삶아주었다. 여름은 그렇게 언제든 반으로 무언가를 잘라서 사랑과 나누어 먹는 행복의 계절. 간혹 나는 그 순간이 너무 좋아서 할머니 몰래 속으로 기도하고는 했다. 내 수명을 뚝 잘라서 당신께 주세요. 그렇게라도 좀더 지금일 수 있다면, 조금만 더 느리게 녹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가 지금 이대로의 우리일 수 있다면.
고명재, 「더위사냥」,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난다, 2023년
사랑했던 이가 내 곁에 없는 순간에도 우리는 그 사랑을 온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어렸을 적 외할머니가 만들어주셨던 김치의 맛이 문득문득 느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럴 때 눈을 감으면 밥 위에 김치를 올려 먹던 기억이 흘러듭니다. 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던 할머니의 표정도 함께 말이죠.
아, 말하다 보니 입안에 침이 고입니다. 기억은 오감을 함께 저장해 마음을 더 뭉클하게 만듭니다. 이제 더 이상 할머니의 김치를 먹을 수 없어 마지막 남은 김치통을 연 채 울었던 날이 떠오릅니다. 저는 아마 할머니의 김치 맛을 기억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기억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강력해서 저는 꿈속에서 할머니의 김치를 쭈욱 찢어 밥에 올려 먹곤 했습니다. 그 맛은 이미 제게 새겨진 것이겠죠.
가슴에 머리에 손톱에 혈관에 눈빛에 사방에 지금 이 순간에 불어오는 바람 속에 토실토실한 빵 속에 당신이 있어요. 그렇게 우리는 눈부신 연관 속에 있어요. 눈 감으면 언제든 안을 수 있어요. 그러니 보고플 땐 눈 감아요.
고명재, 「능」,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난다, 2023년
눈을 감으면 무서운 순간도 있지만 행복한 순간도 있습니다. 내 곁에 없는 것들과 내 곁에 없는 이들을 떠올려 볼 수 있는 온전한 시간이거든요. 아마도 눈꺼풀에 기억이 살포시 매달려 있는 건 아닐지 상상해 본 적도 있답니다. 너무 그리울 땐 우리 모두 눈을 감고 함께 나눴던 대화를 떠올려 보세요.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더라도 함께 나눈 눈빛, 숨소리, 문장은 여전히 내게 있을 테니까요.
4화를 써 내려가며 저는 아무래도 문장 수집이 체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슬픔이 말라가는 순간에도 고독이 눈처럼 소리 없이 쌓이는 순간에도 제가 모은 문장들이 응원해 주는 매일이 너무나 따뜻하기 때문이랄까요? 겨우 하나의 문장이 무슨 힘을 갖느냐고 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문장 하나하나가 쌓이다 보면 나의 생각이 되고 말이 되고 가치관이 되기 때문에 그 힘은 생각보다 강력합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4주의 시간 동안 저의 문장들이 여러분에게 따뜻한 차 한 잔처럼 온기를 전해주었기를 바랍니다. 저는 오늘도 어딘가에서 수줍게 발끝을 툭툭 치며 볼을 붉히고 있을 문장들을 찾으러 가보겠습니다. 여러분의 노트에도 문장들이 쌓이는 그날을 상상하며.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올 것이 있다. 비와 눈은 오는 것. 기다리는 것. 꿈의 속성은 비와 눈처럼 녹는다는 것. 비와 눈과 사람은 사라지는 것. 그렇게 사라지며 강하게 남아있는 것. 남아서 쓰는 것. 가슴을 쏟는 것. 열고 사는 것. 무력하지만 무력한 채로 향기로운 것. 그렇게 행과 행 사이를 날아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