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나는 마침내 자유로워졌다.
한 달 전 두 번째 직장에도 찾아온 부모와 최후의 성전을 치른 후, 안전하고 완전한 분리를 위해 법적 제도까지 활용해야 했다. 사전 동의나 연락 없이 툭하면 거주지와 직장에 쳐들어오는 부모를 막기 위해, 다시 직장에 찾아올 경우 경찰 신고 이력을 남기는 방법을 안내받았다.
나의 부모는 가정폭력 관련해서 기록을 남기길 꺼려했다. 법적으로나 사회적 위치를 유지함에 있어 불리할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영악하게 사회적으로 나의 목을 죄어 집에 다시 가두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내가 회사에서 잘려 경제력을 잃고, 부모의 집에 다시 들어와 집안일을 돌보고, 교회에 다니고, 원치 않는 결혼을 하길 원하는 사람들이다. 나의 삶에서 부모를 완전히 분리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는 동안엔 흔들리기도 했다. 그 때 마다 결심이 흐려지지 않도록 내가 인지하지도 못한 채로 당한 팩트를 잊지 않으려 되뇌고 되새겼다. 이것이 내가 자유를 찾고 행복할 길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강제 분리를 한담? 아는 것이 없던 나는 무작정 검색창에 검색했다.
키워드는 비폭력 가정폭력, 정서 세뇌, 부모 간섭, 부모에게 벗어나기, 부모가 직장에 찾아옴 등이었다.
나와 같이 부모가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괴롭힘을 당했던 선배들이 남긴 글들엔 폭행 진단서를 끊지 않고도 가정폭력 상담을 받으면 분리할 수 있는 방안이 있었다. 직장에 쳐들어온 부모를 분리하기 위해 평일 업무시간에 상담을 하는 상담센터에 가야만 했다. 천만다행으로 직장에서는 평일에 상담을 받으러 갈 수 있게끔 양해를 해주셨다. 부모를 마주쳤던 대표님도 당장 하라고 신경을 써주셨다. 이런 직장에 다닐 수 있었던 것도 내겐 행운이었다. 정 시간을 맞출 수 없다면 전화로 5차례 이상 상담하는 방식도 있지만 각 상담센터에 문의해야한다. 내 경우는 서울강서양천여성의전화의 도움으로 마침내 상담사실확인서를 발급 받았다. 이 소중한 상담사실확인서는 상담센터와 미리 연락을 하고, 주민센터와 구청에 가서 팩스로 민원을 넣은 창구의 담당 공무원만 볼 수 있도록 상담센터에서 팩스로 보내주신다. 이 또한 직원 외엔 그 누구도 볼 수 없게끔 하는 배려이다. 화곡본동주민센터에서 등본 열람을 제한하고, 강서구청에서 초본 열람까지 제한할 수 있었다. ‘열람을 제한할 자’란에 부모 2인의 주민등록번호를 내 손으로 쓰고 영구 제한으로 지정했다. 나의 모든 정보 열람을 막는 순간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처리해주시는 친절한 공무원분들에 의해 일사천리로 끝났다.
30년의 내 인생의 자유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오늘 이후 부모는 나의 거주지를 알 수 없으며, 나의 직장에도 찾아오지 않는다. 나의 소중한 친구들과 지인들은 내 모든 상황을 알고 지지하며 나를 함께 보호해준다. 구청에 방문했던 날은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이었음에도 내 기분은 쾌청했다. 모든 행정 처리를 마치고 구청을 걸어 나오면서, 고전 명화 쇼생크 탈출의 포스터 문구가 떠올랐다.
┃‘두려움은 너를 죄수로 가두고, 희망은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
나의 10대에는 교회를 가지 않으면 몰아 닥치는 강압으로 인해 두려웠고,
20대에는 불안한 미래로 인해 부모에 대한 짝사랑을 접기가 두려웠다면, 30대에는 희망만이 가득하다.
종교의 그늘이 짙은 가정에서 모태신앙을 물려받아 태어난 죄로 부모는 늘 나를 핍박했지만,
사실 나는 벗어나기 두려워하는 그 마음 속에도 스스로 갇혀 있었다.
부디 남은 인생은 부모가 친 것이 아닌 내 인생의 울타리를 무사히 넘기를 희망한다.
일요일 아침, 나는 이제 핸드드립 커피를 마시며 휴일을 행복하게 보내기를 희망한다.
자유롭게 펼쳐진 나의 시간을 온전히 나의 꿈으로만 채워나가기를 희망한다.
나는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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