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이 없었다. 카페가 좋아서 서교동으로 이사를 왔다는 게.
치열하게 사랑했던 이에게 보낼 편지를 쓸 생각이었다. 누구를 가장 치열하게 사랑했을까 고민하다, 누군가와 나눈, 아니 누군가에게 준 대부분의 사랑은 치열하지 않았나 싶었다. 하지만 치열함과 치기 어림을 구분하기 힘들어 누군가가 아닌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치열하게 사랑했던. 사람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주말마다 찾던 카페가 있었다. 살던 곳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져 있어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야만 갈 수 있는 먼 곳이었다. 멀어 다니기 불편해하다 결국 카페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왔다. 이사를 온 이유가 카페 하나만은 아니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카페였다. 걸어 3분 거리에 카페가 있자 하루가 멀다고 찾아갔다. 한 잔에 7천 원이나 하는 커피를 매일 마시고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렇게나 좋아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3분 거리에 있는 카페를 시간이 지난 이제는 찾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스스로 물었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마침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은 날이었고 예보대로 비가 내리기에 오랜만에 카페를 가보기로 했다. 우산을 펼쳐 짧은 걸음을 옮기자 찰박찰박 빗물이 튀고 바지 끝동이 젖어갔다. 가는 길 익숙하고 또 낯설어 조금씩 마음도 젖어갔다. 비든 눈이든 내리는 것이면 뭐든 예쁘게 담기던 카페였다. 투둑투둑 우산에 닿는 빗소리에 맞춰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묘한 설렘과 기대감이 차올랐다.
어깨보다 낮은 담 넘어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한 카페가 보였다. 널찍한 마당을 둔 카페는 오래전 서교동의 대저택이라 불렸다. 저택의 외형과 마당을 고스란히 살려 카페로 바뀌었지만, 겉으로만 봐서 그 용도를 알기 힘들었다. 모르고 지나치는 이를 위한 배려인지 담 끝 입구 쪽 황동 판에 [앤트러사이트 COFFEE ROSTERS]라 새겨진 간판이 붙어있다. 간판을 끼고 돌아 넓지만 낮은 계단을 올랐다. 한 칸 올라서고 잠시 뒤 길게 세 칸을 더 오르고 짧게 세 칸을 더 올라섰다. 올라선 높이에 맞춰 잘 정돈된 마당이 보였다. 크기 다른 소나무와 동그랗게 가지치기 된 회양목, 이제야 잎이 나기 시작한 감나무가 내리는 봄비를 맞고 있었다. 새삼 이 짧은 입장로를 얼마나 오갔는지, 잠시 생각하다 계단에 고인 물웅덩이를 밟았다. 괘념치 않고 계단을 마저 내려가 신발을 털고 우산을 털고 카페로 들어갔다. 어둡고 습한 내부에선 물먹은 나무 냄새가 났고 습기를 머금은 나무 바닥에선 걸을 때마다 삐걱 소리가 났다. 어둠 속에서 익숙하게 길을 찾아 계단을 올랐다.
단을 오르자 넓은 창 앞으로 넓은 테이블이 있고 자주 앉던 자리가 비어있었다. 자리를 먼저 정하고 커피를 시켜야 하기에 가방을 놓고 익숙하게 커피를 주문했다. 언제나 먹던 원두를 골라 차갑게 주문하고 언제나 앉던 자리에 앉아 언제나처럼 노래가 나오지 않는 조용한 공간을 둘러봤다. 짙은 나무 바닥 위 골조가 그대로 드러난 벽과 천장. 기둥과 기둥 사이 크게 난 통 창. 나무로 된 테이블과 의자. 부족하진 않지만, 넉넉하지도 않은 조명. 깨끗하게 닦인 유리잔. 투명한 얼음. 짙은 커피가 바닥과 같은 짙은 나무에 받쳐 나왔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여전히 짙은 맛을 느꼈다. 이어 편지를 쓰기 위해 패드를 펴고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틀었다. 이곳에 오면 언제나 듣던 노래도 있었다.
치열하게 사랑했던 카페에 앉아있으니 편지는 쉽게도 쓰여졌다. ‘철이 없었죠. 커피가 좋아서.’라는 유행어로 시작해 괜스레 눈치가 보였지만, 다행히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앉아 공간을 눈으로 읽으며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차근차근 옮겨 적었다. 짧지만 산책로 역할을 충분히 해주었던 입장로. 꽃이 피면 새가 날아드는 넓은 정원. 넓게 깔린 나무 바닥을 밟을 때 나는 소리며 어두운 조명과 적막함. 이전과 다르지 않은, 여전해 좋은 모습을 옮겨 적으며 ‘역시 나의 카페는 치열하게 사랑할만 했구나’라는 만족감에 젖어 들었다. 비는 창문 너머로 내렸지만, 나는 흠뻑 젖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페를 나왔다. 글을 다 쓴 것은 아니었다. 딱히 가야 할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서둘러 일단 밖으로 나왔다. 우산을 펼쳐 비를 막고 들어왔던 길을 빠르게 거슬러 나갔다. 그러다 그만 계단에 고인 물웅덩이를 밟았다. 카페로 들어오다 밟았던 웅덩이였다. 이곳에 물웅덩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또 밟고 말았다. 사실 괜찮은 척 했지만, 들어올 때부터 신발이 젖어 찝찝했다. 물에 젖은 신발로 나무 바닥을 걷자니 미끄러웠고 난간 없는 계단은 위험했다. 조명이 어두워 더 불안했고 자리에 앉아 커피를 시켰을 땐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창가 앞자리는 생각보다 습했고, 빗소리가 커 집중이 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며 점점 손님이 많아졌고, 노래 틀지 않은 공간은 금세 대화 소리로 시끄러워졌다. 좋지 않았다. 이전과 다른 카페의 모습과 그걸 좋지 않다 느끼는 자신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카페를 나왔다. 치열하게 사랑했던 공간이. 내가 사랑했던 기억들이 안 좋은 기억으로 덧씌워지는 것을 놔두고 싶지 않았다. 물 웅덩이를 또 밟고서야 왜 이곳을 찾지 않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치열하게 사랑했던 공간은 이제 없었다. 이곳이 변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카페는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었다. 언제나 어두웠고, 언제나 조용했으며 사람이 차면 언제나 시끄러웠다. 변한 것은 치열하게 사랑했던 나 자신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내가 치열하게 사랑했던 것은 그 사람, 그 장소, 그것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치열하게 사랑하는 내 모습을 사랑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멋대로 골라보고는 사랑에 빠져 나의 사랑이라 불렀다. 치열하게 사랑했던 나의 카페는 이렇고 저렇고, 주절주절 독단적인 사랑을 읊어대고 있을 뿐이었다. 나의 카페란 애초에 없었다. 나의 사람, 나의 공간, 나의 것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없었다. 내가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무언가를 사랑하는 나의 모습밖에 없었다. 그 사실이 서글퍼 치기 어린 마음을 치열하다 높여 부르고는 스스로를 위안했을 뿐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철이 없었다. 카페가 좋아 서교동으로 이사를 왔다는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