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저 은행 갈 건데 좀 쉬어요. 은행 다녀오는 사이에 죽지는 않을 테니까 안 따라와도 돼요."
"..."
"왜 아무 말이 없어요?"
"진짜 죽을 거야?"
"왜 이래요. 갑자기."
"너 오천만 원은 진작에 모았잖아. 그거 확인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는데. 왜 굳이 오늘..."
"은행 갈 일이 뭐 그뿐이에요? 누가 죽으려고 번호표 뽑는 사람 있어요? 그런 거 아니에요."
"같이 가. 내가 명색이 네 마음인데 어떻게 떨어져 다니냐?"
"그러시던지."
남자는 마음을 뒤로 한 채 옷장에서 녹색 니트와 검정 슬랙스, 머스터드 색 양말 그리고 아끼는 트렌치코트를 꺼내 입었다. 큰마음 먹고 첫 월급으로 백화점에서 산 트렌치코트는 여태껏 중요한 날에만 아껴 입는다며 잘 입지 않던 옷이었다. 신발장에서 주황색과 갈색이 배색 된 소가죽 로퍼를 꺼내 신었다. 멋진 신발이라 일단 질러놓긴 했지만, 너무 튀어서 신어보지도 못하고 신발장에만 고이 모셔뒀었다. 우디향이 그윽한 향수도 무심하게 칙칙 뿌렸다.
"은행 간다며? 소개팅 가는 거였어? 그런 말 없었잖아."
"소개팅은 무슨. 그냥요. 아낀다고 안 입고 튄다고 안 신고 그러면 나중에 버리기밖에 더 해요? 아끼다 똥 된다는데 똥 되면 아깝잖아요."
"오래간만에 잘 생각했네. 막 이것저것 섞어놓은 것치고는 나쁘지 않은데?"
현관 전신 거울에 비친 남자의 모습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녹색 니트도, 머스터드 색 양말도, 휘황찬란한 로퍼도 그런대로 남자에게 찰떡같았다. 남자는 도로 들어가 다시 옷장을 열어봤다. 세상에 흰색, 회색, 검은색, 남색, 베이지색 외에는 색깔이 없는 것만 같은 옷장이었다. 무채색에 가까운 옷 무덤 틈새로 고작 몇 벌의 색깔 있는 옷들이 보일 뿐이었다. 등 뒤에 마음이 남자의 어깨너머로 옷장을 훑어보며 말했다.
"네가 봐도 좀 심하지? 옷장이 그냥 상조회사네."
"그러게요. 예쁜 옷 입는 거 진짜 좋아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 모양 이 꼴이네요."
"뭘 어쩌다 보니야. 다 네가 남들 눈치 보느라 네 취향을 포기했으니까 이렇게 된 거지."
"제 취향... 이란 게 있을까요?"
신발을 신고 문을 나서며 생각했다. 취향이란 단어가 낯설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무언가 하고 싶은 마음이나 욕구 따위를 남자 삶에서 퍽 오래전부터 희미해진 단어였다. 늘 남자의 삶에는 많은 우선순위가 있었다. 어딜 놀러 갈까 할 때는 연인의 취향이 우선이었고, 큰돈이 나갈 일이 있을 때는 가족의 상황이 우선이었다. 야근에 따라 남자의 일정은 시시때때로 변했고 매일 점심 메뉴를 고르는 일도 남자의 취향은 후 순위였다. 희생이나 배려라는 거창한 단어로 포장할 수도 없는 사소한 것들에도 남자는 늘 자신보다 주변의 상황을 먼저 생각했다.
그렇게 취향은 희미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만, 지금, 이 순간은 남자의 취향에 꼭 맞았다. 조금은 쌀쌀한 듯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거리는 어느 봄날 낮에 알록달록 예쁜 옷을 입고 차분히 길을 걷는 이 순간이.
14.
"어? 민호야. 오랜만이야."
늘 만남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이루어진다. 헤어진 연인을 4년 만에 서울 한복판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살면서 꼭 한 번은 마주치고 싶었던 사람이면서 동시에 평생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어, 유나야. 오랜만이다. 잘 지냈다. 아니 잘 지냈어?"
"풋, 뭐야. 응. 잘 지냈어. 좋아 보인다. 멋진데?"
남자는 '어휴 아니야.'라고 대답할 뻔했지만 어째서인지 그렇게 대답하고 싶지는 않았다.
"고마워. 너도 여전하네."
"뭐가?"
"여전히 예쁘다고."
"뭐래. 어디 가는 길이야?"
"은행에. 너는?"
"아, 나 오늘날 좋아서 그냥 반차 쓰고 나왔어. 딱히 계획이 있는 건 아니고. 그나저나 너는 이 동네에는 웬일이야?"
"나? 나 이 근처에 살아."
"혼자 나와 사는 거야? 민호 다 컸네?"
"놀리는 거야? 혼자 나와 산지는 좀 됐어. 이제 그럴 때도 됐고."
"그런가?"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가던 길을 가야 할지 머물러 더 이야기를 나눌지 두 사람 모두 발끝에는 망설임이 깃들었다.
"그래서 이제 뭐 하려고? 계획 없이 나왔어도 무슨 계획이 있을 거 아냐."
"계획 없이 나왔으니까 아무 계획도 없는 거지. 진짜 여전하구나? 예전에도 엄청 계획적이었는데."
"그런가. 그럼, 커피 한잔할래? 너는 없는 계획이 생기고, 난 내 계획을 깨볼까 싶은데."
"그럴까?"
15.
'그 스케이트보드 어디 브랜드예요? 제가 스케이트보드에 관심이 있어서 그러는데 이것저것 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괜찮으시다면 이 번호로 연락 좀 주세요.'
솔직히 관심을 표현하지도 않고 위트도 없는 저 멍청한 쪽지가 둘의 시작이었다.
남자는 운명이란 말은 드라마에나 있는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뭔가에 홀린 듯, 한 달을 쫓아다니며 불도저처럼 밀어붙인 끝에 둘은 만나기 시작했다. 그 뒤로 남자의 모든 타임라인은 유나가 없이는 완성되지 않았다. 애써 그렇게 하려는 건 아니었지만, 숨 쉬는 모든 순간 자연스럽게 유나가 남자의 삶에 스며들었다. 남자는 유나에게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하지만 남자의 노력이 무색하게 남자가 유나로 인해 행복할수록 남자의 상황은 늘 곤두박질쳤다. 남자의 삶이 대차게 꼬이기 시작한 건 안타깝게도 유나를 만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럴수록 남자에게는 행복과 불안함이 비례했다.
그 불안함이 극에 달한 어느 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유나는 사흘 내내 남자의 옆을 지켰다. 어떤 말도 없이 그냥 자리를 지켰다. 고개를 돌리면 늘 그곳엔 유나가 있었다. 그때 남자는 태어나 처음으로 타인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사랑이란 단어로 설명되지 않았다. 구원이었다.
어느 날, 그 구원이 절망을 말했다.
"우리 그만하자. 이제 나 놔줘. 많이 지쳤어."
16.
이별엔 타협이 없다.
시작은 쌍방의 합의가 필요하지만, 이별은 언제든 일방적인 통보로 가능하다. 그냥 교통사고처럼 언제든 예고 없이 닥쳐올 수 있는 일이다. 이별을 얻어맞은 남자는 무기력했다. 투정을 부릴 수도 억지로 매달릴 수도 없는 일이라는 걸 온몸으로 느꼈다. 그냥 그렇게. 이별이었다.
남자는 한동안 이별을 실감하지 않다가 이별을 부정했다가 이별에 분노하다가 이별을 되돌리려 했다. 그 노력이 무색하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시간이 오래 지난 어느 날, 비로소 남자가 깨달은 게 하나 있었다.
'상대의 거절을 존중할 것.'
이별을 당하는 나의 입장이 존중받지 못했다 여기더라도 상대의 포기는 결국 존중해야 하는 일이다. 두 사람의 합의로 관계를 시작하고 많은 약속으로 관계를 굳건히 하더라도 연인의 약속은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순간에만 유효하다. 한쪽이 더는 관계를 지속하고 싶은 의지가 없다면 손쉽게 끝나는 일이다. 그 배경에 무엇이 있는지 따져 물어도 소용없는 일이다.
그렇게 남자는 남은 이별의 몫을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17.
"잘 끝났어?"
마음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근심보다는 홀가분함이었다.
"은행 아직 하려나? 아직 네 시 전이니까 괜찮겠죠?"
"뭔데, 무슨 이야기 했는데? 일단 상태 보니까 나쁜 건 아닌 것 같은데."
"나쁠 게 뭐 있어요. 오히려 좋았어요."
"왜? 오랜만에 얼굴 보고 이야기해서? 너 설마. 다시 시작하려는 거야?"
"에이. 그건 안 될 거예요. 헤어진 사이는 먼지 묻은 박스 테이프 같은 거예요. 과거의 모습이 어떤 식으로든 남은 관계는 그 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그래서 애써 붙이려고 해도 잘 안 붙어요. 유나가 특별한 사람인 건 맞지만 거기까지죠."
"그럼 무슨 이야기 한 거야? 나 아까 사실 좀 놀랐잖아. 막상 마주치면 아무 이야기도 못 하고 지나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맺고 싶었어요. 유나는 준비하고 끝을 본 이별이지만, 전 시간이 지나도 납득이 되지 않았거든요. 이유를 모르니까... 그래서 물어보려고 했죠. 제 몫의 이별을 마저 끝내려고."
"설마 진짜 물어본 건 아니지? 에이.. 설마. 아니지?
"당연히 아니죠. 그냥 막상 예전부터 묻고 싶었던 말은 산더미였는데 그냥 보니까 그럴 필요 없을 것 같더라고요."
"잉? 그럼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건데?"
"그냥 일상적인 이야기들이요. 어떻게 살았는지, 요새는 뭐 하고 지내는지. 그런 대화의 행간에 다 느껴지더라고요. 우리가 만났던 순간을 후회하지 않았었다는 게."
"그래도 이렇게 잘 지내고 있는 거 보니까 너무 기쁘다. 나 그때 한 말 진심이었거든."
"뭐? 무슨 이야기 했었지?"
"네가 진심으로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했었잖아."
"내가 행복해 보여?"
"음... 그건 아닌가 보네? 그런데 그때처럼 조급해 보이지 않아. 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 같았거든."
"맞아. 욕심이 많았지 그땐. 이루고 싶은 것도 많았고, 해내고 싶은 것도 많았으니까. 그때는 어려서 그랬나? 막 욕심나는 일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그런 게 없어."
"그래도 그때 너보다 더 당당하고 근사해 보이는데?"
"고맙네. 너도 여전하네. 예나 지금이나 이야기 나누다 보면 같이 있는 사람 힘 나게 하는 거."
"그런가? 그냥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거야. 그때는 언제든 무너져 내릴 것 같아서 불안했는데 지금은 진짜 괜찮아 보여서 하는 말이야."
"그래, 고마워. 이제 슬슬 일어날까?"
"그러자... 고마워. 가끔 네 소식 궁금하긴 했었는데 그래도 한때 내가 많이 좋아한 사람이 이렇게 멋진 모습으로 잘 지낸다고 알려줘서."
18.
"지난번에 신은 인정이 많은 분이라고 했었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선선한 봄바람이 얼굴을 스칠 때, 남자가 문득 마음에게 물었다.
"그랬지? 사실 사람들이 신을 너무 대단한 존재로 생각하는데 그냥 똑같은 사람이랑 똑같아. 다만 인간이 본인의 의지를 깨닫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물음을 던지고, 너무 큰 고통을 받는 사람에게 한 번 더 손을 내미는 존재지. 사람들이 말하는 절대자보다는 그냥 영감을 주는 조력자에 가깝달까? 그런데 그건 왜?"
"왜 그런 말 있잖아요. '신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시련만 허락한다'는 말이요. 그 말이 사실 참 미워요. 시련을 겪지 않게 하면 되지 왜 굳이 시련을 줘서 포기하고 싶게 만들까요?"
"시련은 신이 만드는 게 아냐. 무수한 사람들의 관계가 변수가 된 어떤 인과관계인 거지. 결국 인간의 세상은 인간의 말과 행동으로 정해지는 거지 신은 거기까지 관여하지는 않아."
"그럼 그냥 방관자네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요. 감당 못 할 것만 같은 순간이 오면 그제야 신이 건져낸다는 건데, 몇 번 그걸 반복했을 때 모든 사람이 '아, 이제 시련이 끝났구나. 다시 노력해봐야지'하는 결론에 도달하지는 않을 거라고요."
"그럼?"
"시련의 파도에 몇 번씩 몸이 흠뻑 젖으면서 죽다 간신히 살아난 사람이 '또 이런 파도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 싶지 않아. 차라리 난 저 파도에 휩쓸려 가라앉고 싶어' 할 수도 있잖아요. 너무 지치고 너무 무서워서요."
"그것 역시도 사람의 선택이겠지."
"내 곁에 와준 지난 며칠 동안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새삼스레 알게 되었어요. 마치 미뤄둔 방학 숙제처럼 해결되지 않던 물음들이요. '나는 잘살고 있는 걸까. 어떻게 하면 행복한 걸까. 나는 괜찮은 사람인 걸까.' 하는 질문들이요. 그리고 '보기보다 나 참 괜찮았구나', '힘든 와중에 잘 버텨냈구나.' 하는 생각들도 들어 기특하기도 했고."
"나랑 만난 게 그래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건 아니었나 보네?"
"그럼요. 고마워요. 진짜 생각은 많이 해본 것 같아요. 들어가는 길에 술이나 한잔 할까요? 오늘은 내 마음대로 먹고 마시다 뻗고 싶은데. 어때요? 마음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