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갤러리아 백화점 앞. 늦은 새벽.
도로 위 오가는 차는 많지 않고 점멸된 신호등만이 언덕진 경사로 위에서 깜빡거린다.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들. 술 취해 비틀거리는 하반신. 그 사이로 멀쩡히 서 있는 J(남. 29세)의 하반신. 검은 바지 검은 운동화를 신은 J의 하반신 앞으로 택시가 선다. S(여. 29세)의 내레이션이 깔린다.
(S) 오늘도 내일이 돼서야 퇴근한다는 것.
근면하고 성실하게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
그러한 바지런한 삶을 꿈꿔온 J가 아니었지만,
J를 향한 회사의 요구는 달랐다.
#2. 사무실. 늦은 새벽. (과거)
불 꺼진 사무실 홀로 일하는 J의 뒷모습. 자정을 넘어가 오른편으로 기울어진 시계 시침. 시간을 슬쩍 바라보는 J. 홀짝이고 내려놓은 캔 커피 옆으로 보이는 비닐봉지. 그 속에 담긴 삼각 김밥 비닐 2개.
(S) 남다른 비전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응당
남다른 노오-력(비꼬듯 강조)을 해야 한다는 것.
남들보다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하라는 것.
J를 향한 회사의 요구는 당당했지만
정당한 대가가 뒤따르지 않아 부당했다.
#3. 사무실. 낮. (과거)
인테리어 공사 현장에서 시멘트를 나르는 J. 날리는 먼지에 콜록거린다. 이윽고 찾아온 팀장님. 도면을 가리키며 알 수 없는 이유로 J에게 화를 낸다. 화장실로 가 홀로 먼지를 터는 J. 세수하며 얼굴을 벅벅 닦는다. 벅벅 닦인 얼굴은 새빨갛고 눈시울 역시 붉어져 있다. 눈가에 맺힌 것이 그저 남은 물기인지 J의 눈물인지 알 수 없다.
(S) 사회 초년생에게 그 부당함은 응당 감내해야만 하는 것이었고 버티고 또 버티는 것만이 유일한 책무처럼 보였다. 백지 혹은 백치 상태의 사회 초년생에게 회사는 열정이란 마법의 단어로 감내와 책무를 요구했다. 신입사원 J는 오늘도 열정 있게 일을 했고 야근을 하고 있다. (비장하게) 근면하고도 성실하게.
#4. 택시 안. 늦은 새벽.
J (택시 문을 닫으며)
기사님. 월계동 그랑디오피스텔 앞으로 가주세요.
(톤 바뀜) 아 응. 택시 탔어. 잠시만...
(이어폰을 꺼내 오른쪽 귀에 꽂는다)
불 꺼진 택시 안에서 누군가와 통화하는 J. 창밖으로 도시의 야경이 지나고 바람 소리가 새어 들어온다. 대화가 오가지만 수화기 너머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J 응. 이제 끝났어.
그렇지 뭐. 맨날 하는 야근.
(한숨) 그러게. 힘드네, 이거.
매번 내일이 오늘이 되어서야 집으로 가는 거.
힘들다 힘들어.
(다정히) 그래 뭐 하고 있었니? 밥은.
그래 잘했네, 잘했어. 맛있는 거 먹었네.
어이구 잘했네.
그래 시간이 몇 신데 진즉 먹었겠구나.
어~ 그럼. 나는 먹었지.
그냥 간단하게 편의점에서 때웠어.
멀리 나가기도 귀찮고 해서 그냥.
근데 이 시간까지 여지껏 안자고 뭐 했어?
아니~ 뭐 (웃음) 그래.
전화를 내가 걸어놓고 물을 건 아니구나.
그래애~ 여태 글 쓰고 있었구나. 늦게까지~
근면 성실하네. 10분. 아니 20분만.
보통 그 정도면 집에 도착하더라.
그래. 그러니까 통화 좀 하자. 조금만.
나 도착하면 그때 자. 아니지. 그때 다시 글 써.
아니~ 무슨 일 있는 건 아닌데.
그래. 고마워. (살짝 웃는다)
택시는 어느새 한강 위를 지나고 대교의 가로등 불빛이 J의 얼굴에 그림자를 속도감 있게 긋는다. 피곤한 J의 얼굴이 깜빡깜빡 그림자 속을 들어갔다 나왔다 한다.
J 그치. 요새 이렇게 일 시키는 데가 없지.
뭐? 모르겠어. 우리 회사는 그런 거 안 쓰던데. 야! 계약서는 무슨 나 여기 월급도 얼만지 모르고 들어왔는데.
그럼~ 아직도 이런 곳 많아. 이쪽 계통은 대부분이 그렇대. 계약서 쓰고 야근 수당 챙겨주고 그런 곳이 흔치 않아. 그래도 이렇게 버티다 보면 언젠가...
전화기 너머로 고함치는 소리가 들린다.
J (기겁하며) 아! 그래그래. 알았어. 알았어.
그렇게 소리 지르면 밑에 층에서 안 올라오니?
아랫집 사람들 참을성이 좋으시데?
목청 좋은 걸 왜 층간 소음에 써.
어디 노래자랑이라도 나가지 왜 그러고 있니.
(작게) 아니이... 그래 알지. 그냥 버티고 있으면 그냥 호구 되는 거라며. 알지. 기억하지. 근데 호구가 뭐 ‘나! 호구다!’라고 말하고 다니는 거 봤니? 자각을 못 하니까 호구지. 자각하는 거 그거 쉽지 않다? 스스로 인정해버리면 정말 내가 호구가 되는 거잖아? 그거 인정하는 게 쉽지 않아. 인지 부조화란 말이 괜히 생겨난 게 아니야. (잠시 생각에 잠기다 혼잣말처럼) 아... 그러네. 인지 부조화 그거 능동적으로 생겨나는 거였네. 그치?
J가 혼자서 막 웃는다. 웃는데 행복해 보이진 않는다. 웃어야 행복해진다고 믿는 사람인 듯 열심히 웃는다. 열심히 웃었지만, 행복해 보이진 않았다.
J 하... 모르겠다~ 모르겠어. (한숨)
내가 왜 이렇게 버티나 싶다.
습관 같은 건가? 습관처럼 출근해서 습관처럼 스트레스받고 습관처럼 참고 또 습관처럼 버텨. <습관의 힘>이란 책 봤니? 거기서 얘기하더라 습관엔 힘이 있다고. (허탈하게) 근데 내가 만든 습관이 나한테 힘을 쓴다. 그러라고 만든 습관이 아니었는데. 책에서 만든 습관은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애써 만든 습관이 날 짓눌러.
그냥.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다니다 보니까.
그냥... 새벽에 퇴근하는 것도 익숙해져 버렸네.
그래. 이런 거 익숙해지고 그럼 안 되는 거 아는데.
익숙해진다는 게 다 좋은 것만이 아닌 것도 아는데.
익숙해지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게 익숙함 아닌가?
이렇게 익숙해지고 나니까 이게 보통 같기도 하고...
평범함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은 것 같아.
아니 의욕을 잃은 건가.
이 익숙함에서 벗어나는 게 무서워.
매일같이 찾아오는 고통을
매일같이 감내하는 반복이 안정적으로 느껴져.
이 루틴이 깨지는 게 불안해. (헛웃음)
예측할 수 없는 행복을 추구하는 것보다
예측할 수 있는 불행을 감내하는 게 안정적이라 생각돼.
그치? 나 지금 제정신 아닌 거겠지?
하... 모르겠다. 요새는 정말 모르겠어.
내가 뭘 모르는지도 모르겠어.
내가 모른다는 건 알겠는데...
한동안 J의 침묵이 이어진다. 전화기 너머의 상대방도 함께 침묵을 유지한다. 차는 내부순환 고속도로를 따라 계속 달린다. 창밖으로 불 꺼진 건물들이 빠르게 지난다.
(S) ‘모름’이란 잘못에는 얼마의 형량이 내려지는 걸까. 사람이 뭐든 알 순 없는 노릇인데. 누구나 모르는 게 하나쯤은 있을 텐데. 모른다는 사실로 힘들어하는 J는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일까.
판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피고인도 피의자도 모두 J 한 사람이 다하는 법정 안에서 왜 스스로 형량을 부여한 것일까. 스스로를 변호하는 것에 게을렀던 것일까. 스스로 무거운 형벌을 내리는 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예상 못 했던 것일까.
나 역시도 이렇게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하나 알 것만 같은 게 있다. 침묵 속의 J는 분명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하차도에 들어선 택시. 그늘에 가려진 J의 얼굴. 이내 지하차도를 빠져나오며 다시 J의 얼굴이 보이고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표정이 보인다. 좌측으로 그랑디오피스텔이 멀리서 보인다.
J 아! 기사님.
저기 주유소 앞에서 유턴해서 내려주세요.
네네. 저기 횡단보도 앞에서. 네네.
(톤 바뀜) 어. 응. 이제 다 왔어. 그래 금방...
아 네! 기사님. (카드를 건네며)
네! (카드를 받으며) 네에~ 감사합니다.
#5. 그랑디오피스텔 앞. 늦은 새벽.
J 응. 이제 내렸어.
그래그래. 너도 고생했다. 어여 자렴.
아니! 글마저 쓰렴. (웃음)
그래 통화해줘서 고마워.
응응. 그래 내일, 아니 오늘 또 연락할게.
그래그래~ 응~
J가 오피스텔로 들어간다.
카메라가 건물을 따라 위로 올라가며 페이드 아웃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