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래왔다. 나에게 주어진 것은 정직하게 열심히 했다. 너무 정직했다. 또박또박, 또각또각 걸었다, 발끝만 보며 걸을 땐 괜찮았다. 한걸음 한 발짝이 재미있고 의미 있었다. 트랙 안으로 떨어진 후 걸음 내디딜 때 들리는 내 발걸음 소리가 잘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시선이 흐트러졌다. 사방으로 들리는 사람들 발걸음 소리가 거슬렸다. 그리고 그 흐트러진 시선 속에서 벌어지는 트랙 안 줄 세우기에 정신이 팔렸고, 나도 그 줄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앞줄이 아닌 곳에 세워진 내 모습을 바라보며 조급했고, 이 마음을 건드리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날카롭고 뾰족해진 날이 늘었다. 달리지도 멈추지도 못하며 답답한 마음은 조급함을 다시 불렀다.
유학생 시절, 처음으로 집에 놀러와 여행을 같이한 친구가 있다. 한국에서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교에 다녔었다. 밀라노에서 시작된 친구와의 여행은 포르투갈 스페인으로 이어졌다. 스페인 과자, 초콜릿이 마음에 들었던 친구는 마트에서 한가득 장을 봤고, 작은 기내용 가방에 차곡차곡 담았다. 밀라노로 돌아가는 공항에서 친구는 추가 짐으로 여겨질 옷들을 임시로 넣어둔 쇼핑백에서 꺼내어 다 입었다. 무더운 여름에 그렇게 옷을 다 껴입고 비행기를 탔던 대학생 시절 그녀였다. 그 웃기고 더운 시간을 함께하며 더 가까워진 친구다. 서양화를 전공한 그녀는 그림을 그렸고 화실, 카페도 운영했다. 지금은 작은 사업을 하며 주로 집에서 지내고 있다.
아직 오래되진 않았지만, 성인이 된 후, 가까운 친구 중 가장 비정형화된 직업과 삶을 살고 있는 친구다. 그녀에게 내 마음을 열어 하나하나 설명하며 뾰족해진 나를 보여주었다. “줄 세우기 때문에 나 자신이 초라해지는 게 싫어. 그리고 나를 평가하는 듯한 사람들의 말소리와 눈짓, 행동이 불편해” 그녀는 말했다. “내가 바뀌면 상황이 바뀌고 모든 게 바뀌더라. 공부 중이야 내가 더 바뀌려고. 요즘 읽고 있는 책이 있는데, 의식의 높낮이 그리고 의식을 높이는 이야기에 대해 말해. 예를 들어 의식이 높으면 저 사람은 의식이 낮은 사람이구나 그래서 그렇구나 하고 그러려니 하는 거야. 상처받을 것도 기분 나쁠 것도 없어져. 다른 사람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도 내가 판단하고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주관성이 강하잖아. 우린 세상과 사람들을 바꿀 수 없어. 근데 나 자신은 바꿀 수 있지”
언제부터인지 비효율 삭제를 위해 비좁게 달리고 있는 나에게 그녀는 이런 말도 했다.
“나는 세상을 풍성하게 느끼며 살고 싶어”
라인이 더 짙어지고 좁혀진 트랙에서 달리지도 멈춰 서지도 못하고 있는 나에게 그녀는 지우개를 던져주었다. 지우개를 들고 좁아진 라인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