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흰색들을 위하여
어느 카페에서의 일이다. 옆 테이블 사람들이 피피티 과제를 하는 모양이었는데, 색을 잘못 넣는 실수였는지 한 명이 “멍청아, 니가 무슨 색맹이냐?”하는 말이 들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 테이블을 보았다. 실수를 한 이가 멋쩍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문득 20여년 전의 화실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색약이다. 색각이상이라고도 하는데 남성 기준 5% 정도의 인구로 발생한다. 흰색과 검정을 제외한 대부분의 색이 조금씩 다르게 보인다. 나는 특히 녹색계열의 색들을 유독 다르게 보는 적록색약이다.
가까운 몇은 알고 있지만 나는 내가 색약인 사실을 좋아한다. 보통 사람들이 보는 색과는 다른 세상을 보고 산다. 정말 필요할 때는 색약렌즈를 끼고 '원래'라는 색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에겐 색약이 되는 렌즈를 낄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두 개 다른 색감의 세상을 볼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색약은 질환으로 취급된다. 불편하거나 아프지 않더라도 말이다. 색을 감지하는 망막의 원추 세포가 특정 색깔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거나 느끼지 못 하는 것. 나야 치료법이 없는 게 더 좋다. 이 아름다운 이 세상을 둘씩이나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앞으로도 그대로일 테니까.
어릴 땐 쉽지 않았던 기억이다. 미술학원에 다닐 때 눈 때문에 혼 난 적이 있었다. 열중하며 그리던 나를 선생님은 툭 치며 "왜 멀쩡한 파란색을 하얀색으로 그리냐?”고 물었다.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나는 "하얀색인데요..?”하고 웅얼거렸고, 그는 “멍청아 이게 파란색이지 왜 흰색이니? 얼른 다시 그려!"라며 꿀밤을 주었다. 친구에게 물어보니 그 아파트는 흰색이 아닌 물 먹은 옅은 파란색이라고. 얼떨떨한 표정의 내게 파란색을 그릴 것을 선생님은 명령했다. 눈물이 났다. '그럴리가 없어요. 이 아파트는 하얀색이에요. 파란색이 아니에요'.
그때부터 팔레트에 물감을 섞어내는 일이 망설여졌다. 내가 만든 색은 그리려는 대상과 '틀리고야' 말 테니까. 내 눈에 보이는 건 틀렸다는 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게 진짜라는 말. 그건 큰 충격으로 남았다. 스케치로만 남긴 미완성 그림들을 뒤로한 채 나는 학원을 그만두었다.
20년 전의 그 선생님도, 옆 테이블의 그 사람도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안다. 선생님은 진도가 나가야할 상황에 내가 그림을 장난친다 생각했을 것이고, 옆 테이블의 그 는 친구에게 던진 싱거운 농담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이해한다. 그래야 한다.
다만 이따금씩 마음 속 어딘가에 일렁이는 무언가가 있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고야 마는 게 말이다. 틀리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테다. 아무나 볼 수 없는 색감의 세상을 보는 내 눈에 대하여, 팔레트 앞에 망설이던 어린 날의 나와 지금도 어딘가에서 눈 비비며 갸웃댈 어떤 아이들을 위하여, 주류는 알지 못할 우리 수많은 소수들에 대하여, 파란색이 아닌 흰색들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