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하게도 그순간 미래를 생각하게 됐다. 고대 그리스부터 현재까지의 시간만큼이 지나서 모든 것이 아주 깊은 지층에 묻혀 있을쯤을. 머리 한 켠에 압도적으로 아득한 시간이 주는 무의미함과 허무함이 고였다. 오늘의 고뇌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격동하는 진폭일지라도 아주 멀리서 보면 직선으로 보이는 것처럼 오늘의 고통도 긴 역사 속에서는 얇은 파동일 뿐이었다.
튀르키예에 오기 며칠 전 무성의하게 굴던 A가 있었다. 대충 일하고 무심하게 말을 내뱉는 그녀에게 친절함을 유지하기 위해 고심했다. 그리고 사과하지 않아도 될 순간들에 먼저 사과하는 내가 있었다. 그녀와의 회의가 끝나면 언제나 어깨가 잔뜩 긴장되어 있었다. 유순한 외면과 달리 내면에서는 진도 9쯤의 지진이 기록되고 있었다. 그러나 에페수스에 와보니 그녀는 참 별 게 아니었다. 지중해에 던져진 조약돌 하나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무한한 시간이 주는 공허함은 존재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뒤섞여 나로서의 고유한 의미가 없어진다면 오히려 나의 존재는 오로지 우리 자신에게만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스스로를 위해서 오늘을 나답게 잘 살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부의 자극과 고통은 참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적절히 대응해야 하는 거였다. 그게 에페수스가 들려준 깨달음이었다.
김영하 작가님은 <작별인사>에서 ‘이야기는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삶을 수백 배, 수천 배로 증폭시켜주는 놀라운 장치로 '살 수도 있었던 삶'을 상상 속에서 살아보게 해주었다.’고 적었다. 역사도 이야기이고, 그런 의미에서 에페수스는 건축물 형태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덕분에 에페수스의 삶을 읽어내리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살아보았다. 나의 결론은 이것이다. 잘 살 것. 잘 살아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