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뭐단다고 고친가
가족들이 다 모인 건 오랜만의 일이다. 인천에서 만나 오사카행 비행기를 타기까지 나는 내내 웃고 있었다. 모처럼의 시간이 좋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투리가 너무 웃겼다. 바나나를 가져온 엄마에게 동생은 “아니 엄마, 입국장에서 다 버려야된디 바나나는 뭐단다고 갖고왔당가?”하고 얘기했고, “아니 이놈아 그라믄 있는 걸 먹제 버리믄 쓰냐?”고 답했다.
엄마와 이모가 처음 미국에 놀러왔을 때, 공항을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한참을 웃었다. 뒷좌석 두사람의 사투리를 참을 수가 없었다. 웃음이 멈출 기미가 없자 엄마는 말한다. “오메, 누가 보믄 지도 서울사람인 줄 알겄네?”
동향 출신을 만난 적이 없는데다 오랜만에 사투리를 들으니 그게 너무 재밌었다. 내 고향말을 내가 듣고 웃긴다는 게 희한하지만 정말로 그랬다. 그때도 지금도 웃는 게 전부이고 만다.
지방 사람들은 외국에선 많이 보진 못했다. 수도권 인구를 생각하면 당연지사. 처음 알바를 했던 뉴저지의 한 카페에선 서울 출신 동료들의 요청에 사투리 몇마디를 하게 됐는데, 자지러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이게 재밌는건지 불편한건지 모를 묘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사투리는 세계 어디에나 있다. 미국만 해도 동부-서부-남부의 억양이 다르고 영국-호주-유럽-아프리카 등 지역에 따른 영어 발음의 차이가 뚜렷하다. 여러 나라에서도 저마다의 독특한 영어 악센트가 있다.
다만 한국과의 차이가 있다면 이들 사이에선 서울의 표준어가 갖는 메인스트림으로서의 힘이 뚜렷하지 않다는 것이다. 런던의 어퍼클래스나 워싱턴의 표준어가 갖는 특성이 영어권 내에서도 실재하지만, 해당 지역과 언어를 수용해야 한다는 암묵적 의식, 수도와 지방의 분절을 기반 삼는 상대성을 유독 체감하는 건 한국의 특징인 것 같다. 여전히 사람들은 사투리를 ‘고친다’고 얘기하니까.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말에 킥킥댐이 편키를 종종 바라곤 한다. 인도영어, 텍산 영어에 자연스레 올라가는 입꼬리를 거리낌 없이 내버려 두고, 빅뱅이론의 너드들처럼, 위계가 사라진 자리에서 편안하게 서로를 풍자할 유토피아를 그리곤 한다. 서로 다른 인간의 말과 모습은 그 자체로 흥미롭고 매력적인 것. 잘못되거나 위아래의 문제가 아니니까.
웃기믄 쪼까 웃어도 쓴디 뭐단다고 고친단가. 그놈의 쓰잘 데 없는 위계만 조사블믄 될 것 같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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