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나만의 고질병인걸까? 나는 혼자 식당에서 식사하길 꺼리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한낮의 국밥집에서 홀로 점심 식사를 하고 있는 아저씨들을 조금 거슬려하는 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괜히 혼자 마음 메여하는 것이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가족 드라마를 좋아한다. 그런 시리즈에서는 시간이 지나며 작아지는 부모님의 모습을 그리기도 하는데 에피소드를 보는 내내 복잡한 안쓰러움이 몰려오곤 한다. 태산같던 부모님의 등, 그것이 나뭇가지처럼 약하고 말라가는 것을 보는 마음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수많은 혼밥과 돌봄과 노동의 시간을 지나온 분들을 보며 감히 연민의 감정을 품는 게 우스운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마음 앞에서 나는 쉬이 무력해진다.
한국 수필의 정수라 불리는 피천득의 《인연》을 펼치기 전에 나도 모르게 살짝 웃고 말았다. 누우가 한국 수필의 정수래? 이게 그렇게나 대단해? 그리고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꽤나 숙연해져버려 내가 아까 먹었던 마음을 다 토해내고 싶은 심정을 느끼고 만다.
《인연》은 그렇게 무거운 책이 아니다. 하지만 작가의 삶이 두꺼웠던 탓에 울컥했던 순간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특히 〈1945년 8월 15일〉을 읽는 내내 철렁이고 고양되었다. 이 나라에 불같이 일었던 역사들을 지나오며 쓴 일기와 같은 글들이 가벼울 리가 없는 것이었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들을 다섯이나 낳은 업적을 갖고 계신 분이다. 그리고 키가 작고… 음 그 이상으로 기억나는 특징은 없지만, 험하고 의로웠으며 지저분하고 따라가기 벅찬 시대를 지나오셨을 것을 생각하면 그 인생의 앞 페이지를 넘겨보고 싶은 마음이 다분해진다. 지금은 기억이 온전치 못하실 때나 대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어 이전부터 깊은 대화를 이어오지 못한 것이 통탄스러울 뿐이다.
할아버지와는 특별히 더 어색한 사이였다. 그러나 평범한 명절날 내가 조금 더 일찍 서울로 올라간다는 이야길 듣자마자 ‘우리 성화, 보고 싶어서 어쩌지’하는 말을 뱉어버리는 바람에 얼마나 마음이 일렁였는지 모른다. 한없이 무뚝뚝하고 표현 없던 그의 알맹이는 시간에 풍화되어 다 깎여 있었고 그것은 과연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에 목마른 진심을 숨길 여력이 없어 속절없이 다 드러나버린 모습이었다.
2070년쯤 되면 나도 할머니가 되어 있겠지. 그때도 지금처럼 굳건하고 멋진 마음가짐이려나. 가끔은 한심하고 한심한 자들을 사랑하며 이해하는 사람이 되어 있진 않을까. MBTI 검사를 또 해도 여전히 똑같은 유형이 나올까 궁금해진다.
질문을 조금 바꿔서. 나는 어떤 할머니가 되고 싶은 걸까? 첫 책 제목이 《어렵구나, 20대는》일정도로 20대에 대해 줄창 떠들어대고 있는 사람으로서 나의 30대, 40대, 그리고 할머니가 살 시간까지 그려보는 것 또한 유의미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수많은 시간의 점들을 한 발자국 물러서서 관망한다면 그것이 어떠한 그림이었다,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 내가 찍는 점이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지는 몰라도 어떤 방향으로는 나아가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멋진’, ‘좋은’ 할머니가 되겠다는 당찬 결심을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지금 당장 해야할 일은 요가 시작하기, 그리고 샐러드 만들기. 건강해야 할머니가 되든 말든 할테니까. 이러다 세끼 내내 샐러드만 먹는 사람이 되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다. 태어나자마자 IMF를 겪고 팬데믹 시기에 취업을 준비를 한 할머니로서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 된다면 영광일 테다.
이번 설에는 할머니 댁에 내려가서 또 한 편의 영감을 준 부부에게 절을 하고 용돈을 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