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거, 죽기 딱 좋은 날씨네.”
남자는 TV에서 배우가 내뱉은 대사에 흠칫 놀라 창밖을 바라봤다. 열 평이 채 안 되는 원룸 창밖으로 벚꽃 비가 내렸다. 남자는 ‘이렇게 좋은 날 죽으면 어떻게 해’라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볕이 좋아서 남자는 오랜만에 밀린 살림을 하나씩 해치우기로 했다. 우선 창문을 열고 노래를 틀었다. 세제를 팍팍 넣어 세탁기에 돌렸다. 산처럼 쌓인 설거지 위로는 세제를 들이부었다. 필터 청소한 적 없는 낡은 청소기도 돌렸다. 우-웅, 우-웅. 탁자 위 핸드폰이 울렸지만 남자는 받지 않았다.
남자가 집을 둘러봤다. 북향집은 원래 귀신이 많이 살고, 볕이 잘 들지 않는다. 그래서 싸다. 그럴싸한 간접조명도 있고 종종 벽에 쏘아 영화를 볼 빔프로젝터도 있다. 중고나라에서 샀다. 좁은 붙박이장에는 고작 예닐곱 벌의 옷들이 있었다. 더 비좁은 주방을 지나면 침대가 있다. 현관문에서 바로 보이는 집 안 외딴섬이다. 이불은 포근했다. 그 안에서는 늘 세상이 아름다웠다. 이불 밖은 현실이고, 이불 속은 도피처였다. 남자는 정갈하게 누워 잠을 청했다. 핸드폰이 우-웅 하고 울렸다.
2.
“야! 이 주임! 무단결근을 해? 너 미쳤어?”
무심코 받은 전화 너머로 화가 난 남자가 잡아먹을 듯 소리를 질렀다.
“네, 지금은 아닌데 곧 미칠 것 같아서요. 몸이 안 좋아서 일주일만 휴가 내겠습니다.”
“야, 누가 휴가를 이런 식으로 내! 오냐오냐하니까 기본도 안 지키냐? 너 어디 있어? 당장 들어와!”
“아뇨, 정말 못 가겠습니다. 휴가 관련해서 메일은 넣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저 몸이 안 좋아서 이만 끊습니다.”
“야! 너…….”
통화를 끊자마자 전화가 또 울렸다. 남자는 심드렁하게 거절 버튼을 누르고 연락처에서 박 차장을 차단했다. ‘아, 이제 부장이지.’ 남자는 하품을 한 번 하고는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커피를 한 잔 뽑아서 창밖이 보이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참. 바쁘게들 산다. 다들 행복할까?’
3.
“엄마, 나 휴가 냈어. 오랜만에 아들이랑 데이트할까?”
남자는 대충 걸쳐 입고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에서는 전화가 끊기는 탓에 계단으로 내려가며 엄마와 통화했다. 오랜만에 온 아들 전화에 좋은 마음 반, 걱정 반인 엄마였다.
“아들, 무슨 일 있어? 갑자기 웬 휴가야?”
“그냥. 요즘 너무 일이 몰려서 힘 들어가자고. 잠깐 바람도 쐬고 좀 쉬려고요. 일단 내일 집으로 갈게.”
“그래, 뭐 먹고 싶은 건 없고? 몸은 괜찮지?”
“당연하지. 돈 벌고 있으니 먹고 싶은 건 배 터지게 먹고 지내. 몸도 건강하고. 그럼 내일 봬요.”
“그래. 아 맞다. 엄마 집에 버릴 것들 정리하고 있어. 내일 오면 네가 좀 거들어. 엄마 힘들어서 그거 다 못 내다 놔.”
"알았어요. 엄마 사랑해."
"얘가 왜 이래 갑자기. 알았어, 내일 봐 아들."
아직 7층이었다. 다시 엘리베이터를 탈까 그냥 걸어 내려갈까 고민하다 보니 6층이었다. 남자는 그냥 마음이 이끄는 대로 걷기로 했다. 계획 없는 휴가 동안 온전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원했던 게 바로 그거야. 네 마음대로 하는 거.”
6층과 5층 사이 계단에 걸터앉은 사람이 말했다. 뒷모습만 봐서는 얼추 남자와 비슷한 체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누구세요?”
이 시간에 어울리지 않는 낯선 만남에 잔뜩 경계한 남자가 물었다.
"나? 너야. 네 마음. 내가 너라고."
"네? 그게 무슨..."
걸터앉아 있던 사람이 일어나 남자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이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남자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겠지. 보통 사람들은 경험하지 못 하는 일이니까. 일단 걸을까? 너 어차피 내가 이끄는 대로 걸으려던 참이었잖아. 가면서 이야기해보자고"
4.
"사람들은 보통 세 가지 중 하나는 가지고 있어.
좌절의 순간을 극복하게 만드는 행복, 본인과 주변인들을 통해 다져지는 자존감,
열심히 산다면 오늘보다 내일은 조금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
이 세 가지가 사람을 살아있게 하는 요소거든."
어리둥절한 남자의 표정을 보며 마음이 말을 이어갔다.
"지금 네가 나를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건, 네가 이 세 가지를 다 잃었다는 이야기야. 세 가지를 모두 잃은 사람은 삶의 의욕을 잃고 죽음을 결심하거든. 신의 배려랄까. 이혼할 때도 숙려 기간이라는 게 있듯이 스스로 죽음을 결심한 사람에게는 이렇게 자신의 마음과 마주할 수 있는 기간을 주는 거지."
마음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야기하는 탓에 남자는 자못 놀랐다. 그런 낌새를 알아차린 마음이 급하게 덧붙였다.
"그래도 이렇게 마음을 마주하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야. 술이나 사고처럼 타인의 힘을 빌려 삶을 포기하는 사람이나 죄를 짓고 죽기를 결심한 사람에게는 나타나지 않거든. 아까 말했듯이 이건 신의 배려야. 보기보다... 아니 보이지는 않지만, 신이라는 양반이 생각보다 인정이 있거든. 자신을 가장 잘 아는 본인의 마음과 삶을 되돌아볼 기회를 얻는 건 그만큼 특별한 일이야."
"그럼, 저를 죽지 않도록 설득할 건가요?"
"음. 꼭 그런 건 아니야. 나는 그냥 질문할 뿐이야. 너의 선택이 옳은지 말이야. 선택은 네가 하는 거야."
5.
"질문은 안 해요? 어제는 뭐 삶을 돌아보느니 마느니 그래 놓고서 아무 말도 없네."
남자는 커피를 내리며 퉁명스럽게 이야기했다.
"일단, 그 커피부터 한 잔 줘봐. 너 커피 안 마시면 머리 안 돌아가잖아. 나도 마찬가지야."
정갈하게 정리된 좁은 원룸에 그나마 크게 난 창을 바라보면 남자가 마음과 나란히 앉았다.
"너 지금 제일 가지고 싶은 게 뭐야?"
"기껏 짜낸 질문이 그런 거예요? 없어요. 그런 거. 가지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그런 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어차피 다 돈이고 빚인데..."
"야, 네가 가지고 싶었던 거 내가 아는 것만도 수십 가지인데 거짓말할 거야? 너 고등학교 때 어? 한 학기 내내 짝사랑했던 현정이도 얼마나 목을 맸으면서..."
"아이 그거 좀.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그래요. 하긴, 가지고 싶은 건 많았죠. 옷 욕심도 많고 남들한테 인정도 받고 싶고... 그런데 그런 건 다 없어도 진짜 꼭 이루고 싶은 게 하나 있기는 했어요."
"그게 뭔데?"
남자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고 싶었지만, 이미 모든 걸 알면서도 얄궂게 물어보는 마음을 보며 어차피 숨겨질 수 없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하기로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사는 꿈이요."
"그건 앞으로 하면 되는 거 아냐? 물론 뭐. 사랑하는 사람은 이제 준비하면 되고..."
"그게 안 되더라고요. 그 꿈 하나 이루려면 가져야 하는 게 너무 많아요. 이 조그마한 오피스텔 원룸이 얼마인 줄 알아요? 1억 5천이에요. 6평도 안 되는데 1억 5천이요. 현실은 차갑더라고요. 내 자아가 36평이어도 내 삶은 5.9평. 딱 이만한 거예요. 여기에 내 삶 하나 욱여넣는 것도 힘들었는데 누가 굳이 힘든 미래를 알고도 가시밭길을 같이 걷고 싶겠어요."
"쉽지는 않지. 그런데 고작 그거야? 돈, 현실적인 조건. 고작 그걸 가지지 못하면 다 포기하고 싶은 거냐고. 물질적인 풍요가 없이는 네가 행복할 수도 없는 거야?"
"그러게요. 이런 조건이 중요하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저를 사랑할지 모르죠. 사실 따지고 보면 열등감인지도 몰라요. '아, 난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건 힘든 건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평범하다는 게 진짜 어려운 일이더라고요."
잠깐의 정적은 엄마의 전화 소리에 깨졌다. 남자는 엄마의 전화를 받고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제법 이른 시간이었지만 엄마를 보러 가는 길에 챙겨야 할 게 많은 것 같아 어쩐지 쫓기는 마음이 들었다. 그 뒤로 마음이 느긋하게 이야기했다.
"서두르지 마. 차 키는 입구에 뒀어. 엄마한테 갈 때 다른 거 고민하지 말고 꽃 사가자. 정 뭐하면 과일이나 좀 더 사든지. 그거 빼고는 뭐 준비할 건 따로 없어 보인다. 천천히 해."
6.
"엄마, 나 왔어. 어휴, 이게 다 뭐야?"
"어, 아들 왔어? 잘 됐다. 거 문 앞에 박스 버리고 와. 너랑 민후 초등학교 때 쓰던 물건들인데 아까워서 가지고 있다가 이제는 버려야 할 것 같아서. 일단 그거 내다 놓고 와. 어머, 예뻐라. 웬 꽃이니?"
"그냥, 오는 길에 꽃집 보이길래."
"얘가 안 하던 짓을 하네. 뭐, 꽃은 예쁘네. 꽃은 나중에 엄마가 알아서 볼 테니까 박스부터 좀 내다 놓고 와."
박스에는 뭐 하나 쉽게 버리지 못하는 엄마의 성격이 담겨있었다. 초등학생 때 썼던 지점토 조각칼, 나와 동생의 중학교 시절 성적표, 각 대학의 입학 홍보 책자까지. 돌이켜보면 늘 엄마는 우리와 함께 뛰는 삶이었다. 밭 가는 소처럼 묵묵히 두 아들을 끌고 그렇게 삼십 년을 넘게 매 순간 치열하게 살아온 엄마였다. 새삼 이런 삶을 살면서도 단 한 번도 힘든 내색하지 않던 엄마가 대단해 보였다.
"엄마, 저런 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어? 아니 공부 잘하지도 못했는데 그 옛날 성적표까지 못 버리고 있었대?"
"그게 다 너희 키워온 흔적이야. 진짜 이번에 큰맘 먹고 버린 거다."
"엄마,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엄마는 우리 키우면서 안 힘들었어? 아버지 생전에 일 때문에 맨날 늦고 엄마 혼자 고생한 거잖아. 게다가 아버지 돌아가실 때도 나는 학생이었으니까 엄청 막막했을 것 같은데."
"아, 그럼. 당연히 힘들었지. 그런데 엄마는 너희 아빠 가고 나서 마음 단단히 먹었어. '우리 애들 졸업하고 일할 때까지는 아프지 말아야겠다. 내가 흔들리면 안 된다.' 생각하면서."
"그럼 너무 부담스럽지 않아? 나 요새 진짜 울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대단한 것 같다니까? 솔직히 나는 회사에서 내가 맡은 일 하나 처리하면서도 내 선택이 옳은 건지, 내가 일을 똑바로 이해하고 있는 건지도 헷갈리거든. 내가 열심히 해도 뭐 하나 똑바로 하는 것 같지 않아서 겁이 나. 학생 때는 내 실수는 사과 한 번이면 어지간해서 해결되는데 이젠 그렇지 않잖아."
남자는 식사를 준비하는 엄마의 작은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한참 아무 말 없이 칼질만 하던 남자의 엄마는 칼을 내려놓고 남자와 마주 앉았다. 엄마의 주름진 얼굴에 초라함은 없다.
"다 똑같아. 엄마라고 뭐 다른 줄 알아? 엄마도 외할아버지, 할머니 계셨으면 물어보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엄마도 처음 해보는 엄마고, 너희 아빠 가고 나서 이렇게 가장 역할을 하는 게 낯설어. 그런데 그냥 하는 거야.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니까."
7.
"어휴, 집 두 번만 왔다가는 안 죽으려고 해도 배 터져 죽겠네.
두 정거장 전에 내려서 좀 걷자."
남자는 마음의 말을 따라 두 정거장 전에 내렸다. 둘은 아무 말 없이 걷기 시작했다.
"..."
"엄마 참 대단해. 그렇지?"
"그렇죠. 뭐. 난 엄마는 다 괜찮은 줄 알았어요. 이미 나보다 오래 사셨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어려운 건 없을 것 같았어요. 물론, 말로는 알 것 같다고도 이야기하고 어른이 되니까 조금은 이해도 되는데... 그래도 엄마니까 괜찮은 줄 알았어요."
"그러게. 그런데 겪어본 적 없는 일을 당했을 때는 애나 어른이나 다 같은 처음이잖아. 처음부터 내 계획대로 내 생각대로 척척 해내는 건 욕심 아닐까?"
"사실 늘 불안해요. 하루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데 나는 방향을 잃은 채로 하루를 충분히 채워가지 못하는 기분이거든요. 매일 새로운 시험지를 받아요. 나는 한 문제 푸는 것도 힘들고 어려워서 끙끙거리는데 주위를 둘러보면 다들 쉽게 쉽게 문제를 푸는 것 같아요. 학교 시험이면 찍기라도 할 텐데 매일 삶이라는 24시간짜리 시험을 보는 거니까 그런 것도 안 돼요."
"불안하지. 불안할 거야. 너 기억나? 외고 가겠다고 열심히 공부했는데 중학교 2학년 때 1학기 기말고사인가? 답안지 밀려 쓰는 바람에 한 과목 37점 나왔던 거. 그 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고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지금 지나고 보니 그건 아무 것도 아니었잖아."
"맞아. 그랬었네요. 생각해보면 결국 다 지나가긴 했어요. 그때 친구들이랑 학원에서 몰래 도망 나와서 PC방도 가고 당구장도 가고 잘 놀았었는데... 그러고 나면 또 금세 잊히기도 했고요."
"그래서. 지금 넌 뭐 하고 있어?"
"네?"
"매일 시험을 치르는 너를 위해 네가 하는 건 뭐가 있냐고."
"직장인이 그런 게 어딨어요. 일하고 퇴근하고 유튜브나 좀 보다 보면 자야지."
"치열하게 하루를 견뎌낸 너한테 유튜브면 충분한 보상이 돼? 내가 널 좀 알잖아. 넌 하고 싶은 게 많아. 네가 하고 싶은 것들 솔직히 지금 상황에 할 수 있는데 이런저런 핑계로 안 하는 건 아니야?"
"그건..."
"기억하지? 내가 누구인지. 나한테 변명하지 않아도 돼. 다시 잘 생각해봐. 할 수 없는 건지 아니면 하지 않는 건지."
다시 말없이 걷던 남자와 마음 앞엔 어느새 5.9평의 원룸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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