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줌이나 스카이프 같은 통화가 가능한 어플이 여럿이지만, 내가 처음 미국에 갔을 때만 하더라도 한국에 있는 사람들과 연락할 때면 국제전화를 썼다. 한국에서 만들어간 카드번호를 누른 뒤 휴대폰 전화번호를 눌렀고 그러면 연결이 됐다. 열다섯자리가 넘는 카드번호를 나는 금세 외웠다.
퀸즈의 77가.
각 나라에서 모인 일곱명의 룸메이트들은 주방에 있는 전화기로 집에 전화를 걸었다. 밤낮이 바뀌는 시차 탓에 한국에 아침이 오기까지 나는 기다려야 했고, 뉴욕의 밤이 으슥해질 때면 수화기를 들었다.
각자 시간차를 달리해도 그 전화를 룸메들 역시 꽤나 기다렸던 모양이다. 주방 바로 옆에 붙어있는 내 방에는 불어, 스페인어, 중국어, 일본어가 틈틈이 들려왔다. 한 사람의 수화기가 내려지고 얼마 안 가 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집어들었다. 마치 바통을 넘기는 듯 우리는 모두 한 사람의 주자였고, 저마다의 이야기와 사연을 들고 오랜 시간을 트랙에서 할애하곤 했다.
시대가 본격적으로 스마트해진 것은 그 쯤이었다.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카메라 달린 엠피쓰리, 아이팟을 모두가 갖게 되었다. 2G는 금세 어제의 유물이 됐다. 나와 룸메이트들 또한 그 흐름에 순응했다. 내가 이사를 가던 2월엔 누구도 주방의 전화를 쓰지 않게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 교과서엔 아날로그에 관한 내용이 많았다. 디지털 시대에 묻혀버린 아날로그 감성.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아쉬움. 오랫동안 그것은 추억의 단골 주제였다. 짧은 글들이 올라오는 교내경시대회나 지역 글쓰기 대회에서도 그것은 가장 인기 있는 화두였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중간세대인 내겐 어른들의 추억하는 음성이 이따금 메아리처럼 울린다. 촌스럽고 낡은 편지뭉치를 보여주며 펜팔자랑을 하던 한 선생님은 직접 펜팔을 만나러 미국에 다녀온 이야기를 동화처럼 들려주시곤 했다. 우리도 이런 경험을 꼭 해보라고, 이런 학창시절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요즘은 손편지를 추억하는 이야기를 접하기가 쉽지 않다. 간간히 수기를 중시하는 이들이 있을 뿐, 아련함의 상징이던 손편지의 감성은 문자메세지와 폴더폰으로 자리를 옮겼다. 디지털도 세대를 나눠부르는 용어가 생겼고, 이젠 화면이 접히는 폴더블폰, 메타버스, 챗GPT까지 일반에서도 쉽게 마주하곤 한다. 요즘의 선생님들은 어떤 추억을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있을까.
내 경우만 해도 일기장을 치워두고 랩탑에 글을 쓴지 곧 10년이 된다. 연필과 펜으로 글을 쓰던 시간은 거의 유년의 기억 쯤이다. 책장 구석을 찾아보면 아마 어딘가에 빛 바랜 채 꽂혀 있지 않을까 싶은데. 낯 부끄런 중학생의 이야기가 그득한, 지금은 표지만이 어렴풋이 기억나는 빽빽한 일기장이 말이다.
첫 외국생활을 함께했던, 이름을 더듬어 기억하는 마리에, 이즈미, 나탈리, 첸, 태우형, 지혜누나. 각자의 도시, 세계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내 첫 룸메이트들. 부엌의 전화를 그들은 기억할까. 우리가 주고 받던 그 바통을, 이어서 달렸던 그 긴 레이스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