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부터 발끝까지 말끔하게 차려입은 그는 단단하고, 차가운 돌 같았습니다. 이 공간에 함께 있는 게 분명하지만, 그는 제가 감히 근접할 수 없는 자신 만의 세계에서 특별한 지령을 받은 사람처럼 이질적이면서도 낯선 기운에 휘감겨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서둘러 떠날 채비를 했습니다. 그러고는 기어이 목적지를 밝히지도 않은 채 훌쩍 떠나버렸습니다.
밝은 햇빛이 통유리 창을 통해 정신없이 들이치는 게 참 어울리지 않는 아침이었습니다. 기다렸습니다. 아무런 단서도, 표식도 남겨두지 않은 채로 평소 머물렀던 익숙한 공간을 애써 이탈해 버렸기 때문에 그를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 딱히 할 게 없었습니다. 누군가의 낯익은 공간에서 그가 이방인으로 발각되는 그때를 기다려야했습니다. 사실 알고 있었습니다. 빛이 물러나고 어둠이 장악할 때면 그는 이방인의 색채를 선명하게 드러낼 것이라는 것을요.
예상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경찰서라는 가장 낯설고 이질적인 공간에서 작고 약한 이방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침과는 달리 적어도 그는 우리와 같은 세계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의 세계에서 묻혀온 서늘한 기운을 뿜어대던 그는 적어도 아니었습니다. 고단함과 절망감에 짓눌려 한없이 쪼그라들었지만, 몸과 마음을 꼿꼿이 세운 채 고유한 기품과 온기를 전하려 애쓰는 익숙한 그의 향기가 다시 느껴졌습니다. 이방인은 그 낯선 공간 속에 있는 낯선 이들에게 허리를 굽히고 또 굽혔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익숙한 공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해 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거듭 전하면서요.
그렇게 그는 원래의 공간으로 돌아왔습니다. 깡마른 몸을 옆으로 뉘인 채 기도하듯 두 손을 포개고 가르랑거리며 얕은 들숨과 날숨을 힘겹게 내뱉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를 짓누른 육체의 고단함이 그의 강인한 영혼마저 그 방에 결박해 버렸습니다. 그의 세계가 다시 그렇게 닫혀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눈을 감았습니다. 진한 눈물 한 방울이 고인 것도 같습니다. 조금 뒤 그는 몸을 조금씩 들썩이기도, 허공을 향한 의미 없이 손을 휘젓기도, 누군가와 속삭이는 듯하다가 갑자기 이글거리는 분노를 발산할 것만 같은 어지럽고 산만한 몸짓을 이어갑니다. 수십 개의 암호가 걸려 영원히 해독하지 못할 것 같은 모호한 몸짓과 난해한 표정이 제 눈에 그대로 담깁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요? 고단한 눈물 한 방울을 여기 남긴 채 도대체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요?
제 눈에 직사각형 모양의 빛바랜 수첩이 하나가 들어옵니다. 해지고 닳아버린 종이들이 서로가 서로를 겨우 붙잡고 있는 이 수첩은 숱한 시간 속에서 한참 늙어버린 듯합니다. 원래 수첩이 어떤 색이었는지 가늠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낡고 해져, 본연의 목적은 상실한지 오래입니다.
그런데 반듯한 몇 개의 글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알리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을 느껴졌습니다. 문득 낯선 호기심이 가슴 깊은 곳에서 뭉글뭉글 올라옵니다. 그 수첩 위에는 대한민국 여권이라고 쓰여있습니다. 정지화면 속에 있는 작고 하얀 그 이방인 옆에 그 물건이 가지런히 놓여있어 주인이 누굴까 애써 머리를 굴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제야 생각 났습니다. 그가 오늘 아침 여기를 서둘러 빠져나갈 때 그의 손에 꼭 쥐여 있었다는 것을요. 마치 자신을 상징하는 표식처럼요. 그러고 보니 이전에도 그는 이 물건을 매우 소중하게 간직했던 기억이 나는 것도 같습니다. 조심스레 안을 열어보기로 합니다.
첫 장을 살짝 넘겼습니다. 갑자기 저는 광속에 휩쓸려 광활한 어딘가에 내동댕이 쳐졌습니다. 그 곳은 명도도, 채도도, 온도도 가늠할 수 없는 이제껏 한번도 경험하지 이질적인 공간이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무한대로 확장되면서 그 어떤 종류의 경계선도, 차단선도 찾을 수 없는 모호하고 광활한 공간이었습니다. 차가운 무채색이 발린 고밀도 평면 같은 그의 방에 있던 저는 순식간에 오색찬란한 색이 제각각 빛을 내고, 칸막이 하나 찾을 수 없는 뻥 뚫린 허허벌판 속 이제껏 한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난해한 입체감에 압도당했습니다.
하나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수없이 찍힌 수천 개의 낱개 컷들이 제 주위에서 미친듯한 속도로 되감겨지고 있었습니다. 그와의 연결로 제 감정이 불리해질 때면 저는 주저없이 감정 차단기를 내렸지요. 그러면서 때론 단절의 방으로, 때론 관찰의 방으로 숨어들어 철저하게 감정의 통로를 단절시켜버렸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한 이기적인 장치들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지금만큼은 제 인생 시계가 빨리 감기가 아닌 되감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여권이 그의 시간과 제 시간을 그렇게 함께 빨리 되돌리고 있습니다. 감정과 시간의 동기화가 이뤄지는 복잡한 감정이 거세게 몰려오고 있습니다.
반듯한 이마와 고집스러울 정도로 짙은 눈썹, 생기 충만한 눈과 날렵한 코, 그리고 자신감이 번져 살짝 미소를 품은 입술…
낯선 세계 곳곳에 그가 새겨놓은 찬란한 흔적을 앞다퉈 증명이라도 하듯 공백 없이 빼곡히 적힌 낯선 출입국 기록들…
이방인의 흔적이 모든 경계를 허물어버린 것 같습니다.
저는 낯선 질문들을 마주합니다. 그는 이 물리적 공간과 시간으로부터 철저하게 단절됐던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경계를 훨씬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 만의 자유를 그저 제가 읽어내지도, 받아들이지 못했던 건 아닐까? 지금의 모습이 이방인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이번에는 숨기보다는 그의 시간을 따라가보기로 합니다. 이방인의 시간과 공간을 마음껏 상상하며 동행해보려 합니다. 닳아빠진 여권을 통해 제게 내민 소중한 초대장을 흔쾌히 수락해보려합니다. 이방인의 흔적을 쫓아보려합니다.
이제 연결의 방에서 접속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