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전 쯤에 산 텀블러를 요긴하게 쓰고 있다. 그란데 정도로 커피를 가득 채워두고 하루종일 나눠 마시기에 알맞은 양. 스테인리스라 뜨거우면 뜨거운대로 차가우면 차가운대로 한나절은 온도를 유지해준다.
그런데 표면이 긁힘에 좀 약하다. 주로 가방 안에 넣고 다니고 바닥에 내려놓기도 하는데 그새 여기저기 찍힌 자국이 생겼다. 두어달은 말끔할 줄 알았는데. 온도를 지키는데야 문제가 없겠지만 스크래치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
관리를 잘하든 못하든 물건에 드는 세월은 어쩔 수 없기는 하다. 10년 동안 흠집 하나 없던 선글라스의 이음새가 어느날 많이 닳았다는 걸 깨닫고, 멀쩡했던 시계의 자잘한 스크래치가 별안간 눈에 들어오면, 처음 샀을 때가 벌써 얼마나 되었는지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준 그 모습, 이제껏 멀쩡히 버텨준 그 모습에 일순 애틋한 마음도 든다.
그동안 많은 물건들은 오래되며 때가 타고 망가졌다. 처음 산 헤드폰은 패드 부분이 찌들고 오른쪽 고리가 부서져 미약하게 지직대는 소리가 난다 난다. 즐겨입던 재킷은 빈티지 스타일이었는데 뭔가에 제대로 찍힌 듯 구멍이 나 진짜 빈티지가 되버렸다. 모서리가 찍힌 랩탑은 그 패인 부분이 익숙해져서 덮어놓은 상태에서도 내 것인지를 한 눈에 알아보는 수준.
오래된 것들에 대한 애정은 다 그런 흔적 덕분이다. 손에 잡히는 감각이나 시야에 들어오는 각도, 조금 때가 탄 색감의 오래 된 익숙짐, 나만이 알고 있는 여러 은밀한 사연들. 나를 오갔던 그간의 많은 사람들처럼 잃어버린 것들, 지금도 내 곁에 남은 이들처럼 함께하는 것들. 다 그 나름의 흔적이 남은 것들엔 어떻게든 묘한 애착을 느끼는 것 같다.
오늘도 막차를 타고 집에 도착하면 현관문을 열고 가방을 의자 위에 던진 뒤 커피를 내려 마실 것이다. 방에 들어가 모서리 찍힌 테이블 위로 오래된 랩탑을 꺼내놓을 것이다. 냄비에 물을 올리고 밑잔이 닳은 은빛 컵에 차를 마실 것이다. 커피머신도 달달거리는 게 예사롭지 않은데 오늘은 어떨런지.
아무것도 갖지 않음으로 비로소 온 세상을 차지하는 것이 무소유의 역리라고 했던가. 온 세상을 차지하지 않아도 좋다. 내가 가질 수 있는 것들을 가지고 거기에 새겨진 흔적을 만지며 그들을 가짐으로써 행복한 소유의 순리를 따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