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회색의 고성이라 당연히 휑뎅그렁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성안은 알 수 없는 다양한 느낌의 공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부드러운 아치형의 목조 기둥과 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런지 따듯함이 묻어납니다. 너무 밝지도, 그렇다고 너무 어둡지도 않은 조명이 아늑함을 뿜어내고, 붉은 계열의 카펫이 땅의 냉한 기운을 녹이고 있습니다.
어딘가에서 영사기를 돌리며 초점이 맞지 않는 흐릿한 영화 필름을 투사하는 것 같지만, 지금은 여기에 시선을 두고 싶지 않습니다.
이 성이 꽤 크고 높아 서둘러야 곳곳을 다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끝을 가늠하기 힘든 나선형 계단을 정신없이 올라갑니다. 이상한 시계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분침과 시침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오히려 안도감을 느낍니다.
싱그러운 풀향이 진동하는 방 앞에서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문을 조심스레 열어봅니다. 햇빛이 쏟아지는 느티나무 아래에서 한 꼬마가 숨바꼭질을 합니다. 여러 명의 어른들이 꼬마가 눈앞에 뻔히 보이지만 모른척하며 목이 터져라 어디 있냐고 도저히 못 찾겠다는 시늉을 합니다. 행복을 가득 머금은 꼬마의 미소가 햇빛에 반사돼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제가 잘 아는 누구의 입꼬리와 너무 닮아있습니다.
다른 문 앞에 섰습니다. 사우나에서 볼 법한 열기가 문 틈을 비집고 나옵니다. 한 남자로부터 나오는 뜨거운 기운이었습니다. 열정과 오만함의 아우라로 똘똘 뭉친 한 남자는 그 어떤 장애물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빨리 뛰어가고 있습니다. 거칠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에게 물리적 경계는 딱히 정해져 있지 않아 보입니다. 이국적인 공간에서 언어나 매너 그 어떤 것 하나 부자연스럽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자신감의 여유를 부리는 그를 저는 어느덧 부러워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에게 한 발 다가서고 있습니다.
달콤한 꽃향기가 진동합니다. 살랑살랑 봄바람 부는 날 한 남자가 소중한 한 사람의 손을 꼭 잡고 걸어갑니다. 두 손 꼭 잡은 채 서로의 마음을 충전 중인 연인의 뒷 표정을 바라보며 제 마음도 충분히 설레고 있습니다. 진한 사랑이 전하는 향기 때문일 겁니다.
왠지 모를 익숙한 기운이 흐르는 방에 발길을 멈췄습니다. 위엄 있는 맑은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의 계획대로, 그의 열정대로 강줄기가 형성되진 않았지만, 그를 꼭 빼닮은 작은 사람에게는 그의 한결같은 책임감과 사랑의 에너지가 흘러들어 갑니다. 바다처럼 넓은 지혜를 가득 채운 그 작은 사람의 원천은 그 맑은 강 때문일 테지요.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조명이 조금씩 어두워집니다. 문득 낯익은 두려움이 느껴집니다. 발걸음을 돌려 나가고 싶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미 하나의 방문이 절 향해 열려있습니다. 불빛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보니 촛불이 켜져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매번 제가 못 본 척 도망쳤던 초의 눈물이 산처럼 쌓여있고, 몽당 초는 공기 흐름 따라 춤을 추고 있습니다. 계단을 올라올 때 있었던 그 시계는 이젠 분명 빨리 감기를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견뎌 보기로 합니다. 제가 애써 그에게 한발 다가섰는데 바로 후퇴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만의 추억으로 가득 찬 성으로 초대해 준 그를 저만의 방식으로 이해해보려 합니다. 지금은 낡고 외로운 성이지만, 그 어떤 성보다 우아하게, 그리고 환하게 빛났을 그 절정의 시간을 제 나름대로 상상해보려 합니다. 아마 그는 수많은 추억의 조각들로 채운 방에서 그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지도 모르지요. 세상에 하나뿐인 그녀를 만나 사랑하던 그때의 시간에서 행복해하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별처럼 수 많은 사람들 그 중에 그대를 만나 꿈을 꾸듯 서로를 알아보고,
주는 것만으로 벅찼던 내가 또 사랑을 받고 그 모든건 기적이었음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