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 5분. 공무원들이 퇴근 시간도 지키지 않는다.
지금 출발하면 얼마나 볼 수 있을까.
- 디자이너님. 같이 식사하고 가시죠.
- 아. 제가 약속이 있어서요.
- 서산에서요? 이 시간에?
- 네. 죄송합니다. 식사는 다음에.
거짓말을 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최대한 빠르게 대화를 끝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대화가 길어져도 식사하러 갈 일은 없었다. 주무관님도 괜한 시간 허비하지 않으신 거다. 그리고 나와의 약속도 약속이니... 마음을 더 쓰는 대신 차창 밖 주무관님을 향해 한 번 더 인사드렸다.
6시 13분. 도착 시간 6시 35분. 서두르면 30분 정도 볼 수 있었다. 조급한 마음으로 차를 몰았다. 서산에는 또 언제 올지 알 수 없었다. 온 김에 봐야 할 것은 보고 가야 미련이 남지 않을 것이었다. 퇴근 시간이지만 도로는 한적했다. 하지만 마음은 한적하지 않았다. 차가 금세 산길로 접어들었다. 길이 점점 좁아지고 험해졌다. 산 끝을 향해 올라갔다. 6시 30분. 예정 시간보다 조금 빠르게 도착했다. 해가 길어 다행이었다. 부석사(浮石寺)의 누각(樓閣) 위로 노을이 남아 있었다.
누각은 높고도 길게 뻗어있었다. 사찰에 와 고개를 올려다보게 될 줄은 몰랐다. 얌전하지 않은 생김새의 누각을 보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누각으로 향하는 길을 찾았다. 누각의 오른편으로 흙길이 나 있었다. 이어져 있겠지... 라는 생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각을 등에 지고 걸었다. 이내 뒤로 돌아 누각을 바라보며 걸었다. 올라감에 따라 눈높이가 점점 누각과 비슷해져 갔다. 살짝 숨이 찰 높이까지 오르자 갈림길이 나왔다. 정면의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이 나올 듯싶었다. 왼편으로 난 흙길을 따라가면 누각이 나올 것이었다. 큰 고민 없이 왼편을 향했다. 해가 지기 전에 보고 싶은 곳은 노을이 걸린 누각이었다.
운거루(雲居樓). 구름이 머물다 가는 곳. 할아버지께 배운 천자문이 가끔은 쓸모가 있었다. 천자문과 함께 스님을 대하는 법도 배웠으면 좋았을 텐데. 누각에 앉아 계신 스님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을 하다 일단 고개를 숙여 인사드렸다. 스님께서 합장으로 인사를 받아주셨다.
-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 아. 네. 저... 음... 그냥 구경을 좀 하고 싶어서...
계단을 올라 대웅전을 향했어야 했다. 사찰을 산책하고 싶었던 것이지 스님과의 대면은 예정에 없었다. 산책은 자고로 말없이 해야 하는 법이다. 입 밖으로 말을 내뱉고 나니 사찰을 찾은 관광객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 구경하기엔 여기만 한 자리가 없습니다. 안쪽으로 오시지요.
스님은 합장으로 모았던 손바닥을 펼쳐 누각의 안쪽을 가리켰다. 정중한 손바닥에 하릴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주무관님에게는 잘했던 거짓말과 거절이 왜 나오지 않았던 것일까. 깊은 누각의 안쪽을 향해 걸으며 삐걱거리는 마루의 칸수를 샜다. 스님과의 대화를 피할 길이 없어 보였다. 스님을 지나쳐 손바닥이 가리킨 곳에 자리를 잡았다. 자리에 앉아 바라보니 누각이 얌전하지 않게 뻗어 나온 이유가 있었다. 조용하지만 아름다운 풍경이 보였다. 스님은 허락 없이 들어온 외부인에게 자리와 함께 차를 내어주었다. 차를 건네받고 나니 풍경만 바라보기 마음이 쓰였다. 풍경 대신 스님을 향해 돌아앉았다. 길게 들어오는 노을빛이 스님의 손가에 닿아있었다. 채워지는 찻잔 위로 노을빛이 찰랑거렸다. 붉어진 차가 무엇으로 물든 건지 알 수 없었다.
- 구경할 만하지요.
스님은 물음표를 붙이지 않고 물었다. 대답을 강요하지 않은 물음이었기에 그저 차를 마셨다. 맛을 보아도 차가 무엇으로 물든 건지 알 수 없었다. 스님은 혼잣말 같은 물음을 이어 나갔다.
- 오늘은 차담을 나눌 사람이 없었나 싶었는데. 그래도 찻잔을 여유 있게 가지고 나오니 이리 나눌 수 있어 좋네요. 맛이 나쁘지 않지요.
- 네.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 먼저 인사를 해주셨으니까요.
인사를 안 했어도 차를 건네주셨을까...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물음은 굳이 건네지 않았다. 스님은 해가 지는 것처럼 당연한 것을 말하듯 평온한 어조로 물음을 이어 나갔다. 굳이 물어야 알 수 있는 물음이었다.
-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곳인데 차 소리가 들리기에 오늘은 손이 있는 날이구나 싶었습니다. 여기 앉아 있으면 저 아래가 훤히 보이고 차 소리가 멀리서부터 잘 들리지요. 사찰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불자가 아닌 분이 찾아오시기엔 먼 길 이었을 텐데.
- 제가 불자가 아닌 것을 어떻게...
- 인사를 해주셨으니까요.
합장을 하지 않았던 좀 전의 순간이 머릿속을 스쳤다.
- 아... 네. 조용한 곳을 좋아해서 종종 찾곤 합니다.
- 가끔은 속세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지요.
- 네. 여기는 풍경마저 조용하니 좋습니다.
- 조용한 만큼 재미가 없는 곳이기도 하지요.
- 그런가요. 재미도 없고 조용하지도 않은 곳보다야 훨씬 좋아 보입니다.
스님은 빈 잔에 다시 차를 채워주셨다.
물음도 차도 받기만 하는 것이 민망해 낯선 물음을 건넸다.
- 속세를 떠나오면 이런 풍경을 매일 보고 살 수 있을까요.
스님을 따라 굳이 물음표를 붙이진 않았다.
- 떠나지 않아도 볼 수 있는 것이 풍경입니다.
굳이 떠나올 필요는 없지요. 그리고 속세는 떠나는 것이 아니라 피하는 것입니다.
- 속세의 무엇을 피해 오셨습니까.
- 세속적인 것들을 피해 왔지요.
- 저도 세속적인 것들이 싫습니다.
- 세속적인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보지도 않은 것을 싫다고 말했다.
한없이 가벼웠던 자신이 싫었다. 자세를 고쳐 앉고 스님의 말을 이어 들었다.
- 세속이란 단어는 본디 불교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불가에서는 일반 사회를 이르러 속세라 부르고, 그 사회의 일반적인 풍습을 세속이라 부르지요. 세속적이라는 말이 나쁘게 표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세속적이라는 말은 일반적인 풍습에 잘 물들 줄 아는 사람이란 뜻이기도 하지요.
- 피하고 싶은 풍습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 모든 것이 다 좋을 수만은 없지요.
- 끊임없이 돈을 벌어야만 하고.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과도 좋은 척 관계를 맺어야만 하고. 서로를 비교하고 상처 주고. 그러다 지쳐 관계를 멀리하면 다시 또 외로움이 찾아옵니다. 저는 이런 세속적인 것들이 싫습니다.
세속적인 것이 싫다 말하는 모습이 한 없이 세속적이었나 싶었다. 스님은 조용히 차를 마셨다. 스님의 모습은 세속적인 것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 그런 세속들은 제가 보기에도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다만 좋은 세속을 보려 할 뿐이죠. 노동의 대가로 정당하게 돈을 벌 줄 알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줄 알고. 상처받는 것이 두렵다고 관계를 피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불필요한 관계는 멀리할 줄 알고. 그렇게 세속적일 수 있는 것. 일반적인 풍습에 물들 수 있는 것. 저는 그것을 못해 이곳으로 피해왔습니다.
끝나지 않은 것 같은 이야기에 조용히 차를 마셔서 대답을 대신했다. 차례는 다시 스님에게로 넘어갔고 스님은 다시 빈 잔을 채워주며 말을 이어갔다.
- 저는 정당하게 노동하지 않고 돈을 벌고 있습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도 하지 않고 있지요.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관계를 피해 이곳에 왔고 이제는 더 피할 곳이 없습니다. 세속적일 줄 몰라 속세를 떠나온 인간입니다. 자신의 반을 누군가에게 주면 부부가 되고 그 나머지 절반조차 다른 누군가에게 주었을 때 사람은 부모가 됩니다. 그걸 못해 머릴 깍고 중이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남에게 줄 줄 모르는 인간.
자조적인 이야기가 풍경소리처럼 평온하게 흘러나왔다.
- 저에게 차를 나눠 주신걸요.
- 인사를 건네주셨으니까요.
아까 물었어야 했다. 인사를 건네지 않았어도 차를 주셨을지를.
- 속세를 떠나 살면 이런 풍경이야 매일 보며 살 수 있습니다. 허나 조용하고 재미가 없는 풍경일 뿐입니다. 굳이 떠나오지 않아도 맞이할 수 있는 풍경이지요. 떠나는 것. 피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떠날 수 있는 것이 속세예요. 다만 속세를 떠나면 좋은 세속과도 멀어질 뿐이지요. 저는 이곳을 찾아오는 속세의 사람들이 좋습니다. 그들의 세속적인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아요. 가정을 꾸려 아이를 낳고 한 손에는 자식의 손을 나머지 한 손에는 반려자의 손을 붙든 모습만큼 좋은 세속이 없지요. 그만큼 아름다운 모습이 없어요.
- .......
- 그래서 이렇게 찻잔을 더 준비하고 매일 여기에 나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처럼 누군가가 찾아와 주길 기대하면서요.
- 제게선 어떤 좋은 세속을 보고 계시나요.
스님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대답에 필요한 뜸을 들였다.
-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는 세속을 봅니다. 벌써 해가 저물었습니다. 큰길까지는 가로등이 많이 없으니 내려갈 때는 조심히 운전해야 합니다.
과연. 산속에서는 해가 빨리 진다. 운거루에 드리운 노을빛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대웅전은 보고 가지 못할 듯 싶었다. 서산에는 언제 또 올지 모르는데... 어스름 속에서 조용히 찻잔을 정리하는 스님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님의 뒤를 따라 누각을 빠져나왔다. 스님은 찻잔을 들고 계셨기에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해주셨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았다. 스님은 뒤돌아가셨다. 스님은 뒤를 돌아보지 않으셨다. 돌아보지 않는 스님을 향해 한 번 더 인사를 드렸다. 얻어 마신 차가 모두 세 잔이었다.
* 이 글은 서산 부석사를 다녀온 수기입니다. 실제로 스님과 대화를 나누진 않았습니다. 글 속에 등장하는 스님은 웹툰 <트레져 헌터3> 속 종정 스님 캐릭터를 빌려와 대화를 상상해 적었습니다. 밑줄 친 문장은 웹툰 속 실제 대사를 빌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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