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제발...'
기껏 열심히 도망쳐 급하게 숨어 봤자 복도에 버려진 캐비닛 뒤편이었다. 그 좁은 공간에 몸을 욱여넣은 후 멈출 기미도 없이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고 철퍼덕 누웠다. 누가 지나친다면 충분히 볼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차라리 들키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고통스럽다며 조금도 의도하지 않은 우연인 양 발견되고 싶었다. 하지만 으레 그랬듯이 내가 보일 리가 없겠지.
사람에게 쫓기고 있던 게 아니다. 그렇다고 무시무시한 귀신이나, 우주에서 돌연 넘어온 외계인에게 목숨의 위협을 느낀다는 시답지 않게 판타지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나는 ‘없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새로운 환경은 나라는 존재를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노력했건만, 결국 이번에도 나는 이방인 신세였다. 같은 언어로 뱉어낸다 한들 나의 말은 내가 소속된 세상의 사람들에게 문장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그들의 말 역시 나를 무심하게 통과하여 지나쳤다. 말을 잃는 것을 시작으로 나의 모습도, 존재도 점차 잃어가고 있었다.
무서웠다. 뭘 해도 꿈쩍 않는 현실과 마주해버렸다. 노력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혹사한 시간이 무색해지도록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미래는 공포 그 자체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소리를 질러 비명을 지르고 싶은데 그럴 구실이 부족했다. 점점 내 감정 더미는 저들끼리 뒤섞여 한두 단어로 정의할 수 없게 변해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굳이 연관될 게 없는 순간에도 갑자기 들이닥치곤 했다.
결국 감정 더미는 캐비닛 뒤에 있는 나를 발견해 무기력한 얼굴 위로 왈칵 쏟아졌다. 그 바람에 너무 많은 공포를 한 번에 들이켜버렸다. 이걸 피해 보자고 캐비닛 뒤에 숨는다는 것 자체가 멍청한 짓이었다. 나는 내가 정확히 뭘 무서워하는지도 몰랐다. 실체도 없는 것에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당하고 있으니, 맞서 싸울 방법은 당연히 없었다. 나는 없는 것에게 매 순간 패배하여 평생을 도망 다녀야 하는 신세였다.
이 요란이 멈춘 건 해가 뉘엿하게 저물 즈음이었다. 또다시 공격을 받기 전에 서둘러 캐비닛을 벗어나 하숙집으로 피신했다. 그래봤자 ‘온전히 나의 것’ 이라곤 없는 공간에서 무슨 위안을 더 받을 수 있을까. 이 상태로 거실에 있는 공용 소파에 기력없이 픽, 쓰러지면 ‘가녀린 비운의 화자’인 척이라도 할 수 있었겠지만, 이마저도 실패해버리고 말았다. 소파를 점령한 기괴한 털 덩어리 때문이었다.
“비켜, 나 누울 거야”
내 말을 분명히 들었고 이해도 했을 게 틀림없는 흰색 고양이는 꼼짝도 안 하고 허공만 노려봤다. 하숙집에 사는 이름 모를 녀석을 나는 대충 ‘털 덩어리’, ‘털 뭉치’, ‘털 괴물’ 정도로 불렀다. 도무지 생각을 알 수 없는 털 뭐시기는 늘 한 번에 곱게 말을 듣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뭘 하면 사람을 질색하게 만드는지 정확히 아는 것 같았고, 옆에서 뭐라고 짜증 내든 다 들리긴 하지만 알아서 떠들라는 듯이 가뿐히 무시했다. 간혹 저 녀석한테도 내가 투명인가 싶었지만, 저가 심심할 때는 갑자기 알짱거리다 홀연히 사라지는 걸 보면 마냥 안 보이는 건 또 아닌 것 같았다.
털 뭉치를 살짝 옆으로 밀고 작게나마 내 자리를 만들었다. 그리곤 털썩, 하고 앉았다.
순간 아차 싶었지만 이미 나의 멍청한 행동을 돌이키기엔 늦어버렸다.
팡-!
흰 털들이 사방팔방으로 날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켈록켈록 기침을 터뜨리자 설상가상으로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털들이 입 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총체적 난국이라는 단어는 분명 이딴 순간을 위해 만들어졌겠지. 이미 오래전부터 소파는 온통 이 털 괴물 녀석으로 물들어있었고, 멍청한 행동의 결과로 나 또한 허옇게 변해 소파의 일부분인 양 변신하고 말았다. 몸에 붙은 털들을 손으로 털어냈지만 역부족이었다. 지독한 녀석, 자기 주변을 온통 자기의 존재감으로 덮어버리고 벗어나기도 힘들게 하는구나. 기분 나쁜 재주다.
한참을 박스테이프로 몸에 묻은 털을 문지른 덕에 가까스로 소파도, 고양이도 아닌 사람의 꼴로 얼추 돌아왔다. 안 그래도 희미한 내 정체성을 저 녀석이 단숨에 덮어버렸다. 내 존재가 이렇게도 하찮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저 녀석도, 저 녀석의 털도 실체는 있다는 것이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게 있으니 벗어나기라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캐비닛 뒤에서까지 비겁하게 날 공격하던 무언의 것들보다는 나았다. 그럼, 현실에서 몰아치는 이 실체 없는 감정도, 형태를 만들면 좀 처치하기가 나으려나? 문득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마냥 멍청한 상상은 아닌 듯했다. 사실 나는 내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조차 잘 모르고 도망만 다녔다. 그러니 당연히 승산도 없이 당하기만 했고, 반항은 시도조차 못 했다. 적어도 내가 무서워하는 것의 생김새가 어떤지 안다면? 약하게나마 반격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털 덩어리를 바라봤다. 녀석은 여전히 허공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그 옆에서 나도 녀석과 함께 허공을 노려보았다. 아마 저쯤이려나? 무시무시하고 실체도 없는 주제에 호시탐탐 나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한 무리의 정의되지 않은 괴물 같은 것들이 떠다니고 있겠지.
손을 뻗어 그중 일부를 떼어냈다. 그리곤 익숙하면서도 다룰 만한 형태로 빚기 시작했다. 기왕 하는 거, 그래도 좀 봐 줄 만한 모습으로 그려냈다. 어차피 없어지지도 않을 나의 이 못된 감정들을 평생 데리고 살아야 한다면 꽤나 만만하면서도 친근한 게 낫겠지.
예를 들어, 오늘 나를 괴롭힌 하숙집의 지독한 반려털 녀석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