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 하나도 없다. 머리가 돌아가질 않는다. 오늘 쳐내야 할 업무가 산더미인데 머릿속은 뿌연 먹구름으로 가득해 그 어떤 것도 담을 생각을 안 한다. 마치 생각이라는 걸 아예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진하게 탄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마셔도 머리가 개운해지는 듯 마는 듯 하는 걸 보니 효과가 영 별로인가보다. 그렇다고 안 마시자니 생활 자체가 안 될 것 같이 피곤할 걸 안다. 속은 좀 쓰리지만 피로 위에 커피를 한 모금 더 들이부어 카페인에 찌든 채 다시 키보드에 손을 올린다.
모니터에 눈을 고정하고 자판을 마구 두들긴다. 타닥타닥, 키보드가 요란한 쉴 새 없이 짧고 날카로운 소음을 내뱉지만, 이미 내 귀에는 당연한 소리와 다름이 없다. 전자파에 절여져 이미 뻑뻑한 눈은 마구 써 내려지고 또 거칠게 지워지는 글자들을 한없이 주시한다.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시간 내에 안 끝날지도 모르는 이 업무와 싸워서 제시간에 이겨야 한다는 사실 뿐. 그래서 그런지 오늘따라 키보드를 내리치는 손가락이 한껏 더 거칠다. 타타타타타탕탕, 모니터 속 지독한 업무를 향해 총알을 연신 날린다.
그러다 어느 순간 팡 치듯 집중력이 깨져버리고 말았다. 아까 점심시간에 내뱉은 말실수가 갑자기 머릿속에 훅 치고 들어온 탓이었다. 별생각 없이 했던 말이었는데, 사회생활에서 '별생각 없이'라는 방심을 한 것 자체가 문제였다. 별안간 머릿속은 강한 불안감으로 가득 찼다. '걔는 왜 그런 소리를 하고 난리래' 내지는 '사회에서 할 말 못 할 말 구분도 못 하나'라고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나를 욕하고 있을 것 같았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릿속 여기저기를 때리는 생각들을 멈춰 보려고 손으로 머리를 쥐어 싸맸다.
타탁타타탕탕, 난 분명히 키보드에서 손을 뗐는데도 멈추지 않고 들려오는 타자 소리. 마치 나를 향해 날아오는 수천 개의 총알 같은 이 소리.
온 힘을 다 해 생각을 누르고 다시금 이 정신없는 하루에 집중한다. 다시 귓가를 때리는 키보드 소리, 글자에 잔뜩 묻어있는 전자파와 그걸 그대로 흡수하는 건조한 눈, 몰려오는 피로와 또 커피 한 모금, 이리저리 뚫고 들어오려는 잡생각과 이겨내야 하는 업무, 여전히 먹구름이 껴 있는 머릿속, 그리고 다시 커피 한 모금, 그리고 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다시 반지하 집 앞,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는 손. 어떻게 집까지 도착했는지도 잘 기억나질 않는다. 몸은 이미 문을 열고 고요한 방 안에 들어왔지만, 머리는 도무지 오늘 하루를 놓아주질 않아 여전히 사무실 안과 다를 바가 없다.
결국 끝을 내지 못한 업무가 죄를 물었고, 어디서부터 잘못이었는지 생각을 헤집다 대뜸 마주해버린 점심시간 말실수. 아직도 사람들이 욕하고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또다시 한껏 긴장을 한다. 언젠간 해명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주절거릴 만 한 변명거리를 짜내려 머리를 쥐어싸맨 채 뻑뻑한 눈을 질끈 감는다.
타닥타탕탕, 눈을 감으니 한층 선명해진 오늘의 강박. 키보드 소리가 아직도 울려 퍼지는 것만 같다.
아침에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먹구름은 내 하루를 그대로 삼켰는지 지독하게 따가운 소나기를 쏟아냈다. 온종일 꾹꾹 눌러 담았던 부담감과 죄책감, 잡생각 등이 끈적한 카페인에 마구 엉킨 채 소리 없이 거칠게 눈을 따라 흘러내렸다. 마구 비명을 지르며 울면 좀 개운하기라도 하겠지만 방음이 엉망이라 온 동네에 내 비참함을 알리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땅속 반지하에는 오염된 지하수가 남몰래 잔뜩 방류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