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의 시작은 데일리 일지 작성이다. 오후 6시까지 처리해야 하는 업무를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적어 내린다. 머리가 맑은 오전에 집중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중요한 업무, 피로한 오후에도 처리할 수 있는 업무 그리고 사이사이 자리 잡고 있는 업체 미팅 시간을 체크한다. 이 루틴은 야근을 최소화할 수 있는 중요한 하루의 시작이다. 저녁이 있는 삶을 살기 위한 스타팅 블록(starting block) 같은 것이다. 야근이 덜 할 요일을 예측해 운동 예약을 잡는다. 컨디션을 고려한 가변적인 케파(capacity)에서 매주 처리해야 할 업무와 운동 루틴을 빼고 남은 시간과 에너지를 계산하며 약속을 잡는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그리는 습관이 이젠 꽤나 자연스럽다.
정기적으로 만나는 언니들이 있다. 빛나고 예뻤던 유학 생활을 함께한 소중한 나의 인연이다. 여전히 빛나고 예쁜 언니들이다. 언니들을 만나면 하는 이야기 중 화두는 남자, 근본적으로는 사람과의 관계다.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맞이한 소개팅 일화다. 설레는 소개팅 날이었다. 하얀색 티셔츠와 청 스커트를 입고 하얀색 운동화를 신었다. 준비 시간이 즐거웠다. 얼마나 눈빛이 빛나는 사람일지 궁금했다. 만남 장소는 연남동이었다. 홍대입구역에서 내려 연남동으로 걸어가는 그 길의 음악 소리가 몸을 더 들썩이게 했다.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인사를 나눴다. 약간 껄렁한 그 사람의 말투가 조금 거슬렸다. 음식점을 찾으며 걸어가는 연남동 거리가 예뻐 기분은 좋았다. 밥을 간단히 먹고 나와 와인바에 갔다. 많은 질문이 쏟아져 내려왔다. 고등학교 이름, 대학교 이름, 인턴십 브랜드, 귀국 사유, 사는 동네, 부모님의 경제활동 여부, 오빠의 직업까지 촘촘한 질문들이었다. 다 대답해 주었다. 물어보는데 딱히 다른 말들이 떠오르지 않아 곧이곧대로 다 대답해 주었다. 물어보진 않았는데 그 사람도 본인의 인적 사항을 읊어줬다. 본인이 이렇게 말해주는 이유는 이렇게 다 듣고 괜찮으면 만나라는 본인만의 방식이라고 말해주었다. 인상적인 소개팅이었다.
한 명은 이별에 대한 일화를 얘기했다. 패션 센스가 있고, 아이템별 취향이 있는 남자였다. 입는 스타일마다 다른 안경을 매치할 줄 알았고, 무드별 향수를 바꿔 쓸 줄 아는 남자였다. 언니를 귀여워하고 사랑하는 남자였다.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언니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으려 하는 듬직한 모습도 있었다. 어느 날 그 사람에게 일생일대의 이직 기회가 주어졌다. 1, 2차를 가볍게 통과하고 최종 면접을 앞둔 그는 꽤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언니의 수입을 궁금해했고, 사는 집 평수가 궁금했으며, 부모님의 직업을 궁금해하였다. 그리고 결국 이별을 고했다.
언니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나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안다고 그렇게 이별을 쉽게 결정하는지, 왜 기회를 그만큼만 한정 짓는지, 왜 더 알아보려고 하는 노력이 그 정도인지 화가 난다고 했다. 그렇게 살면서, 사랑을 어떻게 하려고 하며 연애를 왜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머지 한 명은 연애 생활의 짧은 코멘트를 던졌다. 4살이라는 나이 차이보다 더 많은 차이는 아마 사회생활 연차일 것이다. 그 남자는 낭만과 사랑에 대한 꿈을 꾸기엔 생활적으로 지키고 유지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아 보였다. 그 사람을 좋아하지만, 사랑과 낭만이 고프다고 언니는 말했다.
우리는 해맑은 웃음 섞인 울먹임으로 사랑이 하고 싶다고 말했고 낭만이 필요하다고 했다.
루틴을 빼고 남은, 차고 넘치지 못하는 시간과 에너지로 무엇을 한다는 것엔 비효율은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다. 작은 잣대들로 빠르게 판단될 것이다. 변수를 생각하고 모험하는 빈도는 서서히 떨어진다. 결국 가이드라인이 박힌 트랙으로 떨어졌다.
“이 라인을 벗어나 달리면 분명히 비효율일 것이다.”라고 세상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