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정신이 번쩍 뜨였다. 점심 먹으러 가겠다고 하고 숙소로 갔다. 옷도 갈아입을 새 없이, 숙소에서 짐 싸고 도망치듯 급하게 나왔다. 서울은 어느새 겨울이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붙들릴까 트렁크를 안고 뛰다시피 해서 추운지 몰랐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지만 일단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리기를 반복했다. 밤이 되었다. 핸드폰에는 수많은 부재중 전화가 와있고, 문자가 와있었다. 사람들이 제일 많이 내리는 곳에 따라 내렸다. 이제야 몸에 긴장이 풀렸는지 잊고 있었던 추위가 물밀 듯이 몰려왔다. 옷을 좀 껴입으려 캐리어를 여는 순간 내가 얼마나 생각이 없는 애인지 느꼈다. 챙긴 옷들은 죄다 얇고 가벼운 옷 들이었다. 세미 정장 밖으로 어울리지 않는 옷들을 잔뜩 껴입고 밖으로 나왔다.
눈이 소복이 쌓인 거리. 화려한 간판, 큰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 멋지고 이쁜 사람들, 맛있는 냄새, 반짝이는 서울 밤 모습에 넋을 잃었다. 건대 입구였다. 숨이 트였다. 여기서 내 서울 생활을 시작해야겠다!라고 결심했다. 온몸이 찌릿찌릿 거리면서 시려웠다.
한참 길을 걷다 구석진 골목까지 갔다. PC방으로 들어가 알바를 구하고 다음날 면접 보고 시작했다. 알바를 하며 트렁크는 둘 곳이 없어서 지하철 보관함에 넣어 보관했다. PC방이나 건물 계단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곤 했다. 시간이 지나 고시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내 몸을 뉠 수 있는 이 작은 공간이 너무 고마웠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처절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왔다.
그 겨울을 보내는 동안, 20년을 걸쳐 만들어진 나의 모든 게 바뀌었다. 원래 나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말랑말랑한 사람이었다. 그러던 내가 변화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겁 많던 내가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때 못 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난 15년 전 그 겨울을 나의 성장통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 인생에 그렇게 무모한 시기가 한 번쯤은 겪어내야 할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버텨내지 못했다면 아마 난 지금 여기 없었을 것이다. 꿈도 없고, 희망도 없고, 그저 그런 사람으로 자라서 여전히 맹하게 살고 있었을 것이다. 정말 희한한 게 내 몸이 그때를 기억하는지 겨울엔 유독 몸이 아리고 시리다. 그리고 지금은 힘든 일이 있어도 그때만큼 죽을 것 같이 힘들지 않다. 앞으로 또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지만.